안식일은 언제일까?

제 목
안식일은 언제일까?
작성일
2011-03-27
작성자

안식일은 언제일까?

우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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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님은 나더러 주일은 공부도 말고 그냥 쉬라 했다. 아감벤의 책, ≪남겨진 시간≫을 읽던 중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성경에서 안식일의 기원은 창세기 2장 2절에 나온다. 그런데 한글 성경을 보면, 공동번역본과 한글개역개정본이 각기 다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한글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공동번역)
참고로 영어본을 보면, 수많은 판본들이 똑같이 7일째라고 한다.
“And on the seventh day God ended His work which He had don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done.”

공동번역본은 이른바 ‘70인역 성서’를 본땄다는데, 이들은 7일째에 창조 작업과 휴식이 겹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6일까지를 창조시간으로 보고, 7일을 안식일로 삼은 것이다. 이 7일째는 지금의 토요일에 해당한다. 기독교에서 일요일을 주일 삼는 건, 초대교회가 예수의 부활일을 주일로 삼은 데서 기원한 듯하다. 제7일 안식재림교파는 토요일을 고수하면서 다수파를 반성서적이라 비난하고, 다수파들은 거꾸로 안식교파를 (다른 이유로)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모양이다. 이건 한국에서만 그렇지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둘이 친하게 잘 지낸단다.

사실 안식일이 언제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도 바울도, ‘본체는 그리스도’고 그런 건 상징일 뿐(골로새서2:17)이니, “각자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로마서14:5) 한다. 예수도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누가6:5)이라 했는데, 배고픈 제자들이 밀을 따 먹은 정황상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제자들, 곧 인간 모두를 일컫는 말로 나는 해석한다.

내가 궁금한 건 앞에서 소개한 성경의 안식일 규정이다. 공동번역본이 엿새라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모두 “7일째 하던 일을 그치고 쉬셨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이 일하던 날과 쉰 날이 겹친다는 뜻이다. 이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아감벤은 이를 시간[크로노스] 안에 깃든 시간[카이로스]이라 해석한다. 직선 운동 안에 전혀 다른 시간이 들었다는 말이다. 고로 안식일은 진행되는 시간 중 어느 하루가 아니라, 그 진행 가운데서 언제든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어떤 틈, 세상일에 손 놓는 전혀 다른 시간을 뜻한다. 시간[크로노스] 가운데서 그 시간과 내적으로 단절하는 시간[카이로스], 그것이 안식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요일 또는 토요일 하루만 신성시하는 것은 형식적일 뿐 아니라, 세상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안식일을 기리는 꼴이다. 언제든지 세상의 흐름과 단절하여 전혀 다른 시간 흐름을 만들 줄 아는 자, 이미 와 계신[臨在parousia(옆에 있는 것), 이를 기독교에서는 재림再臨이라 하여 나중에 올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기회 있을 때 정리하자.] ‘메시아’를 만나는 자, 그가 곧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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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석 전, 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되도록 잘 대해주려구요… 예수가 암행어사처럼 변장하고 있으니,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요.. 마구잡이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어쩌다 얻어 걸릴 수도 있잖아요….
2011년 3월 27일 오후 6:17 모바일에서 · 좋아요

한효석 설마 부자, 권력자로는 변장하지 않았겠죠?
2011년 3월 27일 오후 6:40 · 좋아요

우한기 ㅎㅎ 잔뜩 무게잡고 쓴 제 글이 무색해질만큼 쉽고 간단하게 정리해 주셨네요. ‘부자’ 나사로는 없을 테죠.
2011년 3월 27일 오후 6:51 · 좋아요

서미현 음 아감벤님은 고전 해석을 좀 많이 자유롭게 하는 편으로 알고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날짜 해석은 진짜 좀 골치 아파요. 예수님이 죽고 나서 부활한 것도 사흘째다, 사흘만이다, 사흘 밤낮이 지난 뒤다 등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던데요. 아마 당시 유대 사람들의 관용적인 날짜 표현 방식을 희랍어/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섬세하게 살리지 못한 문제하고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은데요. 그리고 하느님이 7일째 새벽에 일을 끝내고 그날 나머지를 풀로 놀았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나요?? ;;;
2011년 3월 27일 오후 8:36 · 좋아요

우한기 ㅎㅎ 것도 괜찮은 해석이군요. 아감벤은 시간의 이중성을 통해서 메시아의 날에 관한 벤야민의 생각을 설명하려는 취지에서 이런 설명을 하는 거더군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토요일 다음 일요일 같은 것과는 별개로 흐르는 시간이 있듯이, 메시아의 임함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글고, 엿새와 이레를 구별한 건 70인 역에서 한 번역이라니까, 오히려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로 봐야겠죠. 딴엔 모순을 없앤다고 한 거라네요.
2011년 3월 27일 오후 11:02 · 좋아요 · 1

서미현 응 크로노스 카이로스 용어 구분은 예전에 프랭크 커모드 책 읽으면서 처음 봤던 거 같은데, 그땐 되게 혹했는데 이젠 그저 무덤덤하네요 ;;; 나이 들어서도 개념적인 거에 흥분한다는 것은 정신이 젊다는 증거?ㅎㅎ 부럽…
글구 70인역은 희랍어예요. (나중에 라틴 불가타로 가면 다시 7일 놀고 7일째 휴식으로 돌아가는군요.) 참 특이하긴 하네요. 왜 굳이 6일이라고 고쳤어야 하는지… 분명히 논문이 있을거얌.
2011년 3월 28일 오전 12:02 · 좋아요

서미현 아 아니군요. 문헌서지학적 순서로 보면 70인역(6일째)이 원전에 가까운 거네요. 79인역이랑 시리아역본이랑 사마르티아역본이 다 6일째라고 되어 있고, 7일째(마소라 사본)가 오히려 나중에 나온 건데 으음…
2011년 3월 28일 오전 12:30 · 좋아요

우한기 개념에 흥분한다…라…허허. 그럴 나인 지났죠. 그 두 개념은 논술에도 출제된 적이 있어요.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과 알랭 바디우가 <뉴레프트리뷰>에 쓴 글에서 ‘시간 안의 시간’에 관한 걸 읽고 솔깃하던 차에 아감벤이 개념적으로 정리해줘서 소개하고 싶었을 뿐예요.
2011년 3월 28일 오전 2:35 · 좋아요

Boodeok Jo 허~얼,오늘은 월요일, 메시아 만날 생각허지 말고 열심히 바닥을 긴다..
2011년 3월 28일 오전 11:18 · 좋아요

Eunice Gu 일단 신의 하루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와는 다르다고 봅니다. 누가 창조를 보았겠습니까. 절대자가 곧 창조자임을 고대인들이 크로노스의 개념으로 공간을 형성하는 것을 서술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기님께서 노트해주신 아감벤의 설명이 마음에 드는군요. 크로노스의 양들은 일정하고 기계적지만 카이로스는 궁극과 맞닿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의 6일과 안식의 1일이 크로노스로 환산하기로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일 수도 있고 찰라일 수도 있겠지요. 크로노스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드물게 다가올 수 있는 ‘시간 안에 깃든 시간’을 만나는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잊혀지지않고, 그 순간을 회상할 때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 아니 보이지 않는 궁극적 현실에 있슴을 느낄 수 있는…
2011년 3월 30일 오후 12:35 · 좋아요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