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슈아와 제이콥

제 목
죠슈아와 제이콥
작성일
2011-05-20
작성자

죠슈아와 제이콥, 그리고 80년 5월의 기억 – 밀그램의 실험과 개인의 기억.
안남열 (노트) 2011년 5월 20일 금요일 오후 5:23

나는 스무 살에 광주에 있었고 도청분수대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배부른 놈들’이라고 생각하던 한심한 청춘이었다. 고교시절을 심히 불량하게 보낸 탓에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고교를 졸업한 79년 조직폭력배 일제소탕령에 얻어걸려 같이 놀던 10여명과 유치장에 갇혔다가 동부서에서 물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전대병원과 조대병원 등에서 연고 없는 시신을 두고 다투던 장의업체의 다툼에 끼어들어 시신을 확보하고 불로동 장의업체에게 돈을 뜯어내거나 시내 가게에서 난장 치고 삥을 뜯으며 지내던 암울한 시기였다. 취조실로 먼저 끌려가던 전과자후배 녀석에게 모든 것을 나에게 덮어씌우라고 귓속말로 전했고 잠시 후 끌려가 돈 대주는 배후를 대라는 물고문 당했다. 적당히 반항하다 장의업체 사장 이름을 말했고 내 선배들은 모두 안전해졌다. 호적이 2년 어리게 실린 나는 소년원 송치되었고 친구들과 후배들은 교도소로 갔다. 출소 후 작심한 바 있어 머리를 박박 밀고 시골집에서 지내다가 신우아파트 슈퍼마켓 점원노릇을 시작했다. 삼일을 못 버틸 거라고 선,후배들은 비아냥거렸으나 7개월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짐빨이 자전거에 대소쿠리 바구니를 싣고 월산동 신우아파트와 양동시장을 오가며 야채와 수산물을 실어 날렸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내 속에 그 정체를 알 수 없던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착하게 세상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도 함께 엄습했다. 사고뭉치 동생에 대한 누나들의 애원과 그 점원 생활 중에 만난 여대생의 영향을 받아 80년 조대공전 미달학과이던 통신과에 입학 했다. 그곳을 졸업하면 원양어선을 탈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짧은 시간에 돈을 벌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박정희의 죽음이나 전두환의 등장. 신군부의 패악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고 온전히 내 안의 고민에만 충실하던 시기였다.

5월17일 김대중의 구속과 함께 시작된 도청 분수대 앞 집회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통행을 방해하는 사람들,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5월18일. 도청 앞 집회로 버스가 멈췄고 짜증을 못 견뎌 버스를 내려 택시를 잡았다. 화정동 집으로 향하던 중 잠시 정차한 택시 차창으로 공수부대 복장의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로 시민들을 협박하고 때리는 모습이 거리마다 눈에 띄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경상도 말투의 상스런 욕, 택시가 양동시장 뒷골목을 지나 ‘닭전머리’길로 접어들었을 때 택시가 멈췄다. 무장한 군인들이 검문 중이었고 “저놈 학생이다. 끌어내”라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은 택시에서 끌려 내려져 무수한 몽둥이질과 M16 개머리판으로 짓이겨졌다. 강타당한 무릎이 꺽여 쓰러졌고 정신을 잃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택시기사의 상의가 심하게 찢어져 있었고 택시 앞 유리는 박살나 있었다. 절룩거리며 걷지 못하는 나를 부축해 택시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던 그 사람은 입을 앙 당문 채로 “개새끼들”소리를 연발하다가 “학생 데려다 주고 도청으로 가 데모 해야겠다”더니 택시비를 받지 않고 택시미터기를 꺾으며 사라져갔다.

사흘을 앓아 누워있었다. 전라도 젊은 놈들 씨를 말린다고 공수부대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젊은 사람을 끌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무대 안에서 세탁소를 하시던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병원에 갈 생각 하지 말고 방에서 꼼짝 마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초인종이 울리면 연탄집게를 들고 부엌으로 숨었다. 걸을 수 있게 되자 일어나 거리로 나갔다. 시외전화는 불통이었고 KBS가 불탔다는 소문이 들렸다. 항쟁의 기간 절룩거리며 거리를 쏘다녔다. 농성동사거리에 바리게이트용 목재를 지게차로 쌓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사람들은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을 하고선 흉흉한 소문을 수군거리고 있었다. MBC건물과 세무서가 불탔고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TV 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격렬한 구호와 선동이 이어지던 도청 분수대의 군중 틈에 끼어 앉아있던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청 정문을 지나다가 누군가 나를 불러 돌아보니 후배 녀석이 총을 메고 도청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불량한 시절에 알고 지내던 친구 호걸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를 그 녀석에게 들었다. 상무대에 안치된 시신들.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끔찍한 소문들. 마음속에 공포와 분노가 회오리쳤지만 공포가 분노를 압도했다. 경찰서에서 고문당하면서도 적당히 계산하며 고문을 잘 견뎌내고 그 다지 기죽지 않았던 내가 수많은 끔찍한 주검 앞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힘 센 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생각이야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는 이놈들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진짜 깡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찰라와 같이 짧았던 해방공간. 차량에 올라탄 무장 시위대. 절름거리는 내게 올라타라는 권유는 없었다. 헬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선무방송. 미항공모함이 부산에 다다랐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제 우리는 살았다’며 안도했다. 나도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부지 인자 광주시민 살게 되었네요.” 농협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와 밖에 나가지 말라며 침통해 하셨다. 26일 밤. 광주에 살았던 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들었을 그 여자의 선무방송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들어옵니다. 도청으로 모여 주십시오.” 피토하듯 앙칼지게 울먹이며 들려오는 그 목소리.

아마도 내 삶의 궤도는 그 때 그 목소리를 따라 바뀌었던 것 같다.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으나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얼마나 죽었는지를 두런거릴 뿐이었다. ‘창작과 비평’을 한 질 샀다.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고 내가 사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원양어선 통신사의 꿈은 잊혀졌다.

81년. 과대표가 되었다. 지금은 소식을 알 길 없는 전대 국문과 다니는 것만 기억하는 두 살 위의 모군과 광주일보 기자생활을 한 안*수, 조대공전 화학과의 모군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었다. 등사기를 구입했으나 그들이나 나나 필경은 처음 해보는 거였고 석필을 구하지 못해 볼펜의 알을 빼 낸 후 석필을 대신했다. 대문 옆에 따로 있었던 내 방에서 등사를 했다. 기억나는 문구는 “전두환 군사파쇼 타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전대와 조대를 나눠 야밤을 틈타 강의실에 배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는 없는 행동이었으나 글쎄 그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교수들이 집에 몰려왔고 나는 잡아뗐다. 사실대로 말하면 보안대에 넘기지 않겠다고 학무과장은 협박했고 웃기지 마시라며 일어나 나왔다. 거짓말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 이 흐른 후 총학생회장을 하던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누가 한지 알고 있으나 당신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친구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중앙정보부에 취직했다고 들었다.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1표차이로 당락이 갈렸을 때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내가 자신을 뽑아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졸업 후 해병대 지원했다. 머리 깎고 입대날짜 기다리다가 지원 탈락한 것을 알았다. 건들거리며 세월을 보냈고 남동성당이나 YWCA에서 하는 집회를 구경했다. 남동성당에서 하는 집회에 군복무중 휴가 나온 친구와 함께 갔다가 친구가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입영 통지서가 나왔고 4.16일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신검 받기위해 대기하던 중 수은등 밑에 찬란하게 피어있던 개나리꽃을 보던 내 눈이 아렸다. 내 청춘이 그 샛노란 개나리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에 휩싸인 속에서 수은등 빛을 받아 터질 듯 피어있는 개나리 꽃. 조금 울다가 이를 다시 앙 당 물었다. “씨발 내 청춘 이제 시작인지도 몰라”

엊그제 서일본철도노조 간부들이 광주를 찾았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나 전투적인 노조로 알려진 그들은 5.18 일정에 맞춰 광주를 찾았고 광주일정을 들불기념사업회에 의뢰했다. 강의 한 꼭지를 황광우선배가 맡았고 몸이 불편한 황광우 선배를 픽업했다. 그날 강의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으나 시간 관계상 질의응답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으로 공교롭게 5.18일 당일 자 한겨레에 실린 황선배의 는 칼럼을 낭독하게 되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8369.html

칼럼에 나온 머리에 총상 입은 그 고등학생이 누구라는 짐작은 했으나 자세한 내용은 처음 알게 되었다. 김상호. 그와 한 조직에서 생활한지 20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80년 오월과 관련한 자신의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80년 오월에 관한 내 자신의 얘기를 꺼낸 적이 없던 것 같다. 강의는 훌륭했다. 윤상원 평전을 읽고 왔고 오월광주에 관한 공부를 하고 온 그들인지라 수준 높은 질문이 터져 나왔고 황선배는 적절하고 차분하게 오월광주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했다. 저녁식사자리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김상호의 얘기를 하던 중 내 얘기를 꺼냈다. 황광우선배가 인노련에 있을 시절 나는 광민노련 조직원이었고 을 꾸리면서 알게 되었다. 팜플렛으로만 알고있던 정인, 정윤희라는 필명의 황광우. 그와도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조직 생활을 했다. 내 과거의 이야기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저녁 일정을 끝내고 황선배와 통역을 맡았던 윤교수 김상호와 백형기, 김연옥과 임명규 등과 맥주집에 앉았다. 얘기는 다시 80년 5월로 돌아가 있었고 황선배가 말했다. “머 이런 일이 있당가 …20년 넘게 한 조직에 있었는데 이런 얘기는 오늘 첨 듣네이 …허허 ”

김상호와 내가 그 과거의 기억을 서로에게 말 하지 않았던 것이 우연한 일일까?
그러고 보니 조직생활을 함께한 누구에게도 80년 5월 당시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왜들 그랬을까.

페이스북을 하다보면 눈에 번쩍 띄는 글이 있게 마련이다. 마실미디어 @서미현님의 [밀그램의 실험이 남긴 교훈]이 그랬다. 그 악명 높은 실험은 EBS에서 본 바 있거니와 그 주제로 만든 영화도 본 터이다. 그러나 서미현님의 글은 그 실험이 참가자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반전의 교훈에 관한 글이었고 그 반전의 대목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http://www.facebook.com/notes/%EB%A7%88%EC%8B%A4%EB%AF%B8%EB%94%94%EC%96%B4/%EB%AC%B8%EC%96%B4-%EB%B0%80%EA%B7%B8%EB%9E%A8%EC%9D%98-%EC%8B%A4%ED%97%98%EC%9D%B4-%EB%82%A8%EA%B8%B4-%EA%B5%90%ED%9B%88/218615544817078

이미 절판된 책을 중고서적 판매 싸이트를 뒤져 구입했다.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 실험 10장면이라는 부제가 붙은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 소개된 2번째 주제 ‘사람은 왜 불합리한 권위 앞에 복종하는가?’ – 스탠리 밀그램의 충격기계와 권위에 대한 복종편은 위 링크에 잘 요약되어있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저항한 35%와 순응한 65%의 추적에서 발견한 반전.
저항했던 죠슈아는 석유화학회사 엑슨에 근무했고 2차세계대전에서 “훌륭한 군인으로 개새끼 같은 일본인을 잡아 가두“고 살인을 했다는 암시를 했다. 한편 그 비인간적인 실험 상황에 순응 했던 제이콥은 그 실험을 통해 자신의 순종적인 태도와 직면했고 그것과 싸웠다.
실험 후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했고 윤리운동을 시작했다. 실험에 반항했던 죠슈아는 체제에 순응했던 반면 실험에 순응한 제이콥은 체제 저항운동가가 되었던 것이다.

5월18일 망월묘역 가는 길 곳곳에 나붙은 5월공법단체 추진하는 자들의 프랑.
윤한봉 선배가 끝내 절망하고 만 5월 문제 단체들의 아귀다툼의 끝자락을 보는 것 같다.
이익을 위해 5월 을 팔아먹는 죠슈아와 같은 자들.
광주에서 죠슈아는 그 날 모두 죽었다. 그 항쟁의 기간에 모두 산화했고 병고에 시달리다 죽었다. 아직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을 일컬어 죠슈아라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제이콥이다. 아니 제이콥이어야 한다.
제이콥의 성찰을 잊는 순간, 80년 오월의 기억을 훈장으로 기억하는 그 순간, 그 자는
역사를 팔아먹는 자이다. 오월 영령의 시신을 뜯어먹는 자로 전락한 것이다.

80년 5월을 광주에서 지냈던 동지들은 왜 서로에게 침묵했던 것일까?
그 여자의 울음 섞인 앙칼진 부름을 외면했던 공범자들끼리의 암묵적인 약속 때문일까?
도청에 남아 죽은 이들에게 혹여 욕될까 싶어 차라리 침묵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아직 난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80년 5월 그 날들의 그 기억이 그 들의 삶을 이끌어 왔을 것이고
그들은 아직 그 날들이 요구한 답을 찾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선 아직 싸워야할 날이 많음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이 판에서 도망가지 못하고 여전히 언저리를 맴도는 것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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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sook Kweon님, 장주영님 외 15명이 좋아합니다.

서미현 어설픈 단상 한 구절에 이렇게 강력한 글로 답해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사하다고 할 밖에..
2011년 5월 20일 오후 6:21 · 좋아요 · 1

안남열 서미현님 덕분에 스스로 유폐시켰던 기억을 되 살려낸 것 같습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1년 5월 20일 오후 6:52 · 좋아요

한효석 간신히 누르고 있는 제이콥의 부끄러움을 끄집어내시는군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5월 20일 오후 6:55 · 좋아요 · 1

임명규 글을 쓰고 지우고. 다시 생각하고. 감정을 추스르고. 그 모습이 그려집니다. 정직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5월 20일 오후 9:54 모바일에서 · 좋아요 · 1

Eunice Gu 담담하게도 쓰셨습니다…
2011년 5월 20일 오후 10:31 · 좋아요 · 2

장주영 읽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잘 읽었습니다.
2011년 5월 20일 오후 10:33 · 좋아요 · 1

안남열 한효석 / 선생님 같은 분 앞에서 제가 부끄럽죠
2011년 5월 21일 오전 9:42 모바일에서 · 좋아요

안남열 구약님 / 제가 좀 뻔뻔하죠? ^^; 30년 세월이 그렇게 만든걸껄요.

주영 / ㅡ ㅡ;

명규 / 미래의 지도자로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2011년 5월 21일 오전 9:47 모바일에서 · 좋아요

이순규 소설같은 진한 얘기 잘 읽었슴다.
2011년 5월 21일 오후 12:00 · 좋아요

장주영 엣 어째서 그런 표정이십니까 =_=;;
2011년 5월 21일 오후 1:20 · 좋아요

안남열 주영님 눈물땜에. 감상적으로 토해냈다 싶어서요. ^^;;
2011년 5월 21일 오후 2:31 모바일에서 · 좋아요

김광이 그 시기의 광주, 그 곳에 계셨던 분들, 그리고 그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가시는 분들…한 분, 한 분의 삶의 여정이 모두 시대의 대변사이고 역사입니다. 새삼!
“배부른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온전히 내 안의 고민에만 충실하던 시기였다는 이야기부터…공감이 큽니다. 어떻게 가족에게 짐되지 않고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저의 20대 초반 같아서. 운동권 대학생 친구가 찾아오면 내 속으로만 그랬었지요….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2011년 5월 21일 오후 2:33 · 좋아요 · 1

장주영 제가 원래 좀 잘 울어요. 그리고 뭐랄까… 어째서 30년이 지나고서야 그때의 기억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는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저희 부모님도 두 분 다 광주 분들이라 엄마아빠 생각도 나고 그랬어요;;;
2011년 5월 21일 오후 2:33 · 좋아요 · 1

장휘국 감사합니다.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나는 그 때, 노화도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구요.
부모님은 내가 멀리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2011년 5월 21일 오후 3:08 · 좋아요 · 1

김영란 …. 어제 샘 담벼락에 읽고, 어제 또 읽고. 광주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궤적을 생각해 보고. 거기에 겹쳐서 오히려 그 바로 전 게시물, <그날>이었던가요, ‘갑시다, 자전거’에서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애당초 그런 실험은 없었어야 한다고, 제이콥이든 죠슈아이든 간에. 총든 이도, 총 피하는 이도, 또 자전거 뒷자리가 괴로운 이도, 이제는 없어야 한다는… 이 모든 슬픔과 어이없음 중에 가장 아름답고 당연한 것은 샘의 독백인 듯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했다기 보다 샘이 한번 쯤은 자기 밖으로 내놓아야 했던… 이제 앞으로 나아가시면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 중요한 일을 우리와 나누어주셔서 좋고 고맙습니다.
2011년 5월 21일 오후 4:24 · 좋아요 취소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