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영은 낙타문화마을 카페지기
인터뷰 – 이영은 낙타 문화마을 카페지기
임해규 국회의원은 1995년 부천 시의원으로 당선되면서 2012년까지 시의원으로 3선,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2선을 하였다. 이영은 님은 임해규의 아내로서 20년 가까이 수많은 선거를 치르며 남편을 뒷바라지하였다. 최근 이영은 님이 임해규 의원 지구당 사무실을 “낙타문화마을”이라는 카페로 리모델링하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여야 성향 주민을 가리지 않고 공간을 개방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낙선을 축하도 많이 받아요. 떨어진 본인이야 좋아할 수 없죠. 아주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선생님 말처럼 좋은 충전 기회니까요.
- 2012년 1월에 임해규 의원을 만났다. 그때 굉장히 지쳐 보였다. 임해규 의원을 만난 기억 중에 가장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2012년 총선에 출마하지 말았으면 했는데, 나갔고, 낙선했다. 임해규 의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진심으로 축하했다. 20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려와서 이제는 충전했으면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지구당 사무실이 선거 때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에요. 평소 20개 조직이 한 달에 한 번씩만 모여도 매일같이 이 공간을 쓰는 셈이죠. 그러다 작년 총선 이후 근 1년 동안 사무실을 활용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문득 정당 사무실이 카페 같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카페로 리모델링한 거죠. 좀더 생산적이고 문화적으로 쓰고 싶었어요. 물론 다양한 사람이 오고 더불어 생활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끊을 부분은 끊어야죠.
-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돈이든지, 책임이든지, 명예욕이든지 자기에게 일정한 몫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래서 대체로 ‘집밖 남자, 집안 여자’를 정석처럼 생각한다. 만약 어느 여자가 집밖 여자이고 싶을 때 남편이 반대하면 그 부부는 엄청나게 큰 갈등을 겪게 된다. 반대로 집안 여자이고 싶은데, 남자가 집밖으로 내몰면 그것도 스트레스가 될 터이다.
저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라서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해요. 한 편으로는 평범하게 시골에 가서 나무를 가꾸며 사는, 자연친화적인 사람인데 지금은 그럴 수 없잖아요. 남편은 부천에서 뼈를 묻자고 하고요. 여자는 정말 평범해요. 큰 거 바라지 않고요. 물론 가끔 누구 아내, 누구 누나를 벗어나고픈 마음이야 있죠.
글쎄요. 제 인생을 다시 스케치하라고 하고, 누구 아내로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인생을 살려고 하지 누구 아내로 살려고 하지 않겠지만요, 저는 목수 아내이고 싶어요.
- 어렵다. 빙 돌려 이야기를 해서 못 알아듣겠다. 사실 임해규 의원이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 20년 정치를 뒷바라지한 아내에게는 누구 아내에서 벗어나는 기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결혼하기 전에는 여자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줄 알았다. 여자들이 남편에 매달려 살다가 남편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고, 아이들은 성장하여 엄마를 우습게 알 때, 여자들이 ‘우렁이 껍질’만 남았다고 한탄한다고 하였다. 책에서 그렇다고 하였다. 자연인 이영은의 꿈은 없었을까?
선거가 즐거워요. 저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선거 이후에는 나서기가 두렵죠. 선거 때는 당연히 나서야 하고 오히려 안 나서면 이상한데, 차라리 나설 자리에 나서는 것은 굉장히 즐거워요.
그러나 선거 이후에 남편을 정치판에 보내고 정치인 아내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어디를 가든 누구 아내로 가는 게 모든 자리가 조심스러운 자리이거든요. 구설수를 타기 쉽고, 반은 내 편이고 반은 저쪽 편이니까요. 저쪽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더구나 선거 이후에 남편이 가야할 자리에 아내가 가면 설치는 사람이 되요. 지가 국회의원이야 이런 식이지요. 선거 이후에 역할이 없으니까 내조하는 사람들이 선거 이외의 자리에는 금하게 되요. 소리없이 조용히 지내죠.
- 어릴 적 꿈과 포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인 이영은도 평범하게 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정치인 아내로 또는 아이들 엄마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 남편을 20년 또는 30년을 뒷바라지하다 보니 자기 욕망을 자제하고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꿈을 꿔, 그냥 이렇게 살지 뭐 그렇게 된 것일까? 그래도 목수 아내라는 말은 너무 뜬금없다.
여기 공간을 꾸미면서 이것저것 다 손으로 만든 겁니다. 페인트를 칠하고 그림도 그리고요. 남들은 힘들겠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굉장히 즐거웠어요. 이 작업을 하면서 여자가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래서 목수 아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걸 하고 보니까 집은 못 짓겠나 싶더라구요.
제가 피아노를 좋아하는데, 아마추어라 좋아하는 거예요. 프로들은 잘 쳐야 해요. 아마추어는 잘 칠 필요가 없죠. 아마추어는 자기가 즐기면 돼요. 아마추어는 해보지 않았는데 해보니까 할 수 있겠구나 하며 즐거움을 찾죠. 물론 이렇게 하다 보면 자기 취미가 되고, 언젠가 프로가 되겠죠. 프로 세계를 가본 게 없는데, 제가 정치는 프로라고 해야 하나? 선거를 지난 20년 동안 일곱 번 치렀으니까요.
- 아, 차라리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없으니까 즐기려고 하는구나. 프로 목수가 아니라, 이것저것 서툰 대로 자기 즐거움을 찾으려 목수 보조자를 원하는 것이다. 임해규 의원은 이런 이영은을 ‘사람을 좋아하고 낙천적인 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선거를 즐기고, 선거를 잘 치른다고 생각하여 본인이 2002년 시의원에 출마하려고 했어요?
아니에요. 남편이 2002년 당내 경선에서 부천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떨어졌잖아요? 그리고 바로 부천 시의원 후보로 나간다니까 그건 좀 그렇다 싶었어요. 남들은 놀면 뭐하냐? 젊으니까 남편에게 그냥 시의원 선거에 나가라 했죠. 제가 옆에서 들었을 때 사람이 업그레이드했으면 계속 높은 곳을 향해 나가는 것이 맞지, 넘나드는 것은 좀… 그래서 제가 나가면 안되요? 했던 거죠. 약간 장난스런 거였어요. 정말 생각이 있었던 거는 아니에요.
- 아닌데. 이영은 님이 정치에 생각이 있었는데. 남편 임해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아내는 저를 대신해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저 대신 부천시의원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그냥 묵살해버렸습니다.” 이 글에는 아내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을 텐데, 좀더 잘 풀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 남편은 아내 말을 장난스럽게 듣지 않았고, 그 사실을 내내 아내에게 미안해한 것이다.
정치는 아니에요. 제가 정치할 생각은 없어요. 남편을 오랫동안 돕다 보니까 제가 선거를 잘 하는 사람처럼 느껴요. 선거가 두렵지 않고 사람을 만나서 다가가서 표를 얻고 컴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좋아요. 지금은 어떤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좋겠다, 정치인이 되면 잘 하겠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돕고 싶어요. 특히 젊은 인재들이 올라오잖아요? 정치인으로 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목이 될 거 같다 싶으면 밀어주고 싶어요.
낙타 문화마을에서 그런 걸 했으면 좋겠어요. 이 공간을 젊은 사람이 채워줬으면 좋겠어요. 그중에서 누군가 정치에 뜻을 가진 젊은이가 나타나면 길을 만들어 주고 싶죠. 저는 이곳을 그렇게 만들어 가고 싶어요. 정치적 공간으로 두지 않겠지만, 문화 공간으로 젊은이가 드나들고, 많은 사람이 오고가다가 인재야 하고 눈에 띄면 밀어줄 의향이 있어요.
- 어랍쇼! 정치인 아내로 조용히 살 것처럼 하더니, 자기 꿈이 있다. 정치학교를 만들어 인재를 키우는 곳, 젊은 정치인을 길러내는 공간을 운영하고 싶어 한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기 몫을 찾은 걸까? 맞다. 그렇게 현실에서 자기 몫을 찾는 것도 방법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쉽다. 한 집에 국회의원 남편과 시의원 아내가 있어도 괜찮은 그림이었겠다.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 건데요?
남자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고요. 임해규 의원과 또 결혼요? 안하죠.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빨랐다.) 한 번 했으니까 리바이벌은 없죠.
- 여자들은 다 그렇다. 임해규 오빠가 운동권 학생으로 서울대를 다니고, 노동이며 인권을 이야기하며 수배를 당한 사나이였단다. 형사 미행을 따돌리고 몰래 만나며 연애했다. 그때는 그게 멋있었단다. 지금도 남편에 대한 믿음으로 절반은 콩깍지 끼어 살면서도 다시 태어나면 이 남편과 결혼하지 않겠단다. 네네네. 사모님. 남자들이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아내가 저 세상에서라도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라고 합니다. 푸하하!
남편이 군대에 있을 때 남편 친구 여동생으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만나고 결혼했어요. 저는 평범한 여학생인데, 애 아빠가 노동 운동으로 저를 이끌었죠. 같이 인천에서 야학도 하고, 위장 취업도 하여 해고도 당하고 그랬죠.
애 아빠는 학습부터 시작하여 노동운동 현장으로 온 사람이고, 저는 연애하다가 남자에게 이끌려서 노동운동 현장으로 간 사람이죠. 애인 따라 강남을 간 거죠. (흐흐흐) 야학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풍물도 같이 배우고 그랬어요.
남들은 데모를 주동하고 노조를 만들고, 노동자와 조직을 만들어서 어떻게든지 인권 운동이라든지 노동 운동을 해나가는데, 저는 공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을 못해서 쫓겨났어요. 노동 운동을 해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웃느라고 우리는 뒤집어졌다.)
의식적으로라도 사람들을 꼬셔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그쪽에 동화되었어요. 나중에는 진짜 공순이가 돼서 일을 어떻게 잘 할까, 어떻게 진급할까 고민했다니까요. 남편이 그때는 “아이 참, 이거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했어요.
- 그래. 그때는 순박했겠다. 자기 한 몸도 추스르지 못해 오히려 노동자들이 이 젊은 처녀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노동 운동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고생한 사람 같지 않다. 결혼 생활은요?
힘들었죠. 말로 표현하기 힘들죠. 신혼 초에 닭장집에서 살면서 연탄불을 갈던 때도 있고, 시댁 한 집에서 바글바글 모여살기도 했죠. 남편이 구속되었을 때는 구속자 가족이 살림을 합쳐서 살던 때도 있었고요.
그러다 1995년 그 당시 김문수 지구당 위원장이 자기 선거(1996년 총선)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래서 임해규를 냅다 꽂은 거예요. 국회의원 선거 대리전 식으로 시의원에 한번 나가보라 했던 거죠. 시의원 등록 석 달도 안 남기고 역곡동 동신아파트로 이사했어요. 선거가 뭔지도 몰랐지만, 역곡동 젊은 에너지를 모아서 당선되었어요. 그렇게 남편이 공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 자료에 따르면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12000명 남성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였는데, 여성은 204명이라고 한다. 그 중에 ‘여자 안중근’으로 알려진 남자현은, 24세에 의병 남편을 잃고, 유복자를 키운 뒤 뒤늦게 마흔 일곱에 독립 운동하러 만주로 떠난다. 그리고 61세에 권총을 품고 하얼빈 일본대사를 암살하려다 붙들려 순국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애국자 명단에는 있든없든 김구 어머니도 애국자이고, 안중근 아내도 애국자였으며, 만주 벌판에 남편을 묻고 애비 없는 자식을 꿋꿋하게 길러낸 여인들도 애국자였다. 여성이라서 드러나지 않은 채 그 시대적 노고를 묵묵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영은 님이 낙타 문화마을을 통해 누구 아내로 살지 않거나, 설령 누구 아내로 살더라도 슬기롭게 자기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런 작업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만나는 사람을 다 좋아하는 계기가 되고, 남자들처럼 역사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대로 인재를 키우면서 두고두고 사람들 속에서 정을 나누며 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효석 – 부천고, 부천정보산업고 교사였다. 여월동 안골보리밥집을 정리하고, 약대오거리에서 담쟁이문화원과 안골털레기 식당을 운영한다. 개인 홈페이지 www.pipl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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