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에게 얹혀 사는 것이 미안하고, 딸에게 미안해요.

제 목
시어머니에게 얹혀 사는 것이 미안하고, 딸에게 미안해요.
작성일
2013-09-12
작성자

시어머니에게 얹혀 사는 것이 미안하고, 딸에게 미안해요.

“시어머니 고향이 경기도 광주인데요. 작년까지 거기서 겪은 일제시대 이야기, 6.25전쟁 때 이야기를 하셨어요. 드라마를 좋아하고 탤런트 이름도 다 알았어요. 그런데 올 들어 아까 일도 기억하지 못해요.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무더운 여름이 지났다지만 아직은 햇살이 따가운 어느 날, 우리는 아흔여덟 할머니와 60대 며느리가 사는 임대 아파트를 찾았다. 그런데 삶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리라 기대했던 어르신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셨다.

아뿔싸, 한 발 늦었다. 일본 100세 할머니는 작년에 첫 시집을 출간하여 쓰나미,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지친 일본인에게 100만부를 팔았다. 열 줄 안팎 짧은 시에 희망과 기쁨, 추억, 긍정, 후회, 격려, 의지 같은 정서를 담았다. 나이를 먹은 탓에 오히려 젊은이보다 훨씬 여유로이 세상을 보는 지혜를 지녔다. 그래서 우리나라 할머니한테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일제 말에 처녀를 마구 잡아가던 시절에, 시어머니가 결혼하셨대요. 남매를 낳아 고생하며 키우다가 뒤늦게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저를 며느리로 맞은 거죠. 처음에는 뭐 집을 지을 거다, 어쩐다 했지만 나중에 와보니 보증금도 없는 집에서 살더라구요. 시집을 잘못 왔어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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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약대동에서 오래 사셨다. 아들을 결혼시키고 목수 아들을 따라 장호원에서 2년 동안 살았다. 그러다 술 좋아하는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 바람에 다시 약대동에 돌아온다. 그때 가족은 시어머니, 며느리, 100일된 딸, 이렇게 셋이었다.

“남편이 사고로 죽어 그때 보상도 없었고, 남긴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제가 유리 공장에 다녀 회사 생활을 하고 월급을 받아 세 식구가 먹고 살았어요. 그러다 20년 전에 이 임대 아파트가 당첨되었어요.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오는 집에서 살다가 이리로 왔는데, 지금은 대궐이죠. 정말 고맙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았으면 좋겠어요. 돈이 없어서 나가지도 못해요.”

시어머니가 담석이 있지만, 연세가 많아 수술할 상황은 아니란다. 그래도 어르신 목소리가 또랑또랑하다. 며느리가 해주는 호박죽, 물렁한 것을 좋아한다. 끼니를 잘 챙겨 드신 탓인지,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별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꼿꼿히 앉아 있을 만큼 건강했다.

“글쎄, 뭐가 제일 필요할까? 당장 필요한 것이 뭘까?” 세 식구가 살면서 이거 하나는 꼭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것을 물었더니, 며느리는 한숨을 쉬며 한참 동안 망설였다. 가전제품인지 생활용품인지 소원인지를 꼭 짚어서 듣고 싶었다. 절실한 것이 많아서일까? 나중에서야 슬그머니 “필요한 것은 많지만, 먹고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지금 세 식구가 사는 것이 쉽지 않단다. 자신은 간경화로 노동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스물네 살 딸이 대학교에 다닌다. 수급자로 대학 등록금을 적게 내는데 그나마 그 돈을 대기가 쉽지 않아 딸이 작년에 휴학계를 냈다. 그랬더니 수급자로서 세 식구에게 나오던 생활비가 시어머니만 빼고 작년 5월엔가 다 끊기더란다. 한 달에 90만원을 받다가 졸지에 30만원만 받는 식이다.

딸이 대학교에 다니면 소득이 없어 생활비를 지원하지만, 휴학하는 순간 성인으로서 충분히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단다. 아르바이트 소득이 드러나든 말든 “부양할 가능성”만으로 동사무소에서 지원을 끊는다. 수급자 가정은 정작 돈이 없어 아이가 휴학하는데, 현실에서는 젊은이가 휴학하자마자 수급자 가정은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명절을 맞아 어르신에게 어떤 걸 가장 먹고 싶은지를 물었던 내가 미안했다. 어르신은 “없어, 아무 것도 없어”라고 대답하였다. 알고 보니 먹고 싶은 것이 급한 것이 아니었다. 이 집 딸이, 이 집 손녀가 대학을 졸업하여 정말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대학등록금과 생활비가 급하다.

시어머니와 사는 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서 좋다던 며느리도 결국 가난한 게 부끄럽다고 하였다. 죽지 못해 산다. 몸이 좋아서 공공근로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시어머니보다 나중에 죽었으면 좋겠다. 명절이라서 특별히 갈 곳도 올 사람도 없다. 자기가 지금 시어머니 생계비 30만원에 얹혀 사는 거란다.

100일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딸이 의지할 친척도 없이 지금 서울 남영동 어느 친구 집에 얹혀산다. 그런데도 딸은 말이 없고, 뭘 하고 지내는지 묻지 못한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100세 할머니 지혜를 들으려 했던 우리는 60대 며느리 생활고 앞에서 너무나 미안해 더 할 말이 없었다. (글 : 한효석, 사진 : 최현철)

콩나물신문 1호(2013.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