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옥 한성대 교수 ? 한국전쟁에 한국군위안부 있다

제 목
김귀옥 한성대 교수 ? 한국전쟁에 한국군위안부 있다
작성일
2014-04-5
작성자

김귀옥 한성대 교수 ? 한국전쟁에 한국군위안부 있다

- 은유

전선인터뷰-김귀옥 한성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
– 최영미 < 속초에서> 중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은 지난 6월 25일까지, 그는 누구보다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한성대학교 연구동 805호에는 방송사 카메라가 찾아와 전쟁과 분단을 물었다. 각종 학술행사와 원고청탁이 밀려왔다.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을 전공한 학자는 많지만 젠더(gender) 관점의 평화 연구자로서 김귀옥 교수는 독보적인 존재다. 그는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민중, 여성이 당한 역사적 고통을 집중 연구해 남성중심의 기성 정치사에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동안 그 실체가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북파공작원과 민간인 납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월간 < 말>지와 < 민족21> 등에 기고해 주목을 끌었다.

특히 지난 2002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움’에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아사히신문과 오마이뉴스에 동시에 보도됐다. 조선일보를 제외한 국내 주요 일간지와 뉴스에서도 이 충격적인 사실을 다뤘다. 하지만 한국군의 치부를 건드린 그의 논문은 곧 역사의 뒤안길로 치워졌다. 국방부 자료실에 비치되었던 한국군위안부 관련 자료의 열람이 금지됐고,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했다. 대학 당국에서는 ‘조심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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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한국전쟁 기간 ‘위안부’ 운용 사실을 보도한 일본 < 아사히신문> 출처:오마이뉴스

공공연한 비밀이 된 이 사안은 ‘특종’에 목마른 각 방송사 시사프로 담당자에겐 두고두고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요즘도 계속 전화가 걸려온다.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싶다”고.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하나같이 한국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 공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선정적 앵글의 횡포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것, 역사적 진실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그가 지켜온 윤리이다.

낮에는 빨래, 밤에는 위안

논문은 울지만 얼굴은 웃는다. 국화 같은 누이의 미소다. 저 부드러움으로 50년 바위 같은 시간을 녹였다. 그는 1996년부터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월남인 정착촌인 강원도 속초 ‘아바이 마을’에서 거주했다. 마을에 방을 얻어 반년가량 머물며 현지조사를 벌였다. 사람들의 삶에서 역사를 살피고 읽었다. 현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기억에 내재돼 있는 것을 찾았다. 단순히 이산가족 문제보다 반공주의가 어떻게 삶 속에 체화 되는가 정체성 형성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초에서 월남민 김씨를 인터뷰 하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접했다.

“1950년 유엔군에 체포된 김씨는 민간인인데도 인민군으로 분류되었다. 평안북도 개천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될 때까지 미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밥과 빨래를 했는데 이 월남민이 부대에는 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북말씨를 안 쓴 건 분명하다며 이남사람 같다고 했다. 이북에서 끌고 온 여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즉 미군과 국군이 50년 10월 휴전선을 돌파할 때 이미 여자들을 끌고 갔음을 알 수 있다.”

이후 5년간 김 교수는 인터뷰 등을 통해 “직접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있다”, “군에 납치돼 위안부가 됐다”는 등 남녀 8명의 증언을 청취했다. 결정적으로 한국 육군본부가 1956년 편찬한 공문서 < 후방전사>에 ‘고정식위안소-특수위안대’라고 적힌 부분을 발견했다. 이 책에 실린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는 1952년도에 서울, 강릉 등 4개 소대로 편성된 위안대 89명이 연간 20만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명의 장병을 위안한 것이다.

채명신, 김희오 등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도 한국군위안부의 실체를 뒷받침한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티켓제로 운용됐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운 순서대로 티켓을 나눠주었다”(채명신 ‘사선을 넘고넘어’) “연대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1~4종밖에 없었음) 수령지시가 있어 가보았더니 우리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있었다. 이는 과거 일본군대 종군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으로 일부러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게 온 것이다.”(김희오 ‘인간의 향기’)

하나둘 퍼즐이 맞춰졌다. 앞서 월남민이 말한 것처럼 50년도엔 여자들이 비정규적인 형태로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낮에는 빨래하고 밤에는 군인을 위안했지만,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51년 위안대 설치가 본격화 된 것으로 김교수는 추정했다. 군의 기록에 따르면 위안대 설치의 표면적 목적은 ‘국군의 사기앙양과 전투력 손실 방지’이다.

“좌익혐의자들 성노예화로 응징한 것”

“51년 여름,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다. 후방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주기적으로 전방에서 후방으로 교체되는 장병들에게 뭔가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장교들은 이미 북에 갔을 때 여자들을 데려와서 별도의 위로가 필요 없었다. 전방 최전선의 집들은 장교들이 여자를 데리고 사는 집이다. ‘성은 공평하다’는 남성의 논리에 따라 장병들에게도 위안의 기회를 준 것이다.

남성 증언자들에게 위안부 여성들이 어땠는지 물었다. 화장하고 멋 부린 사창가 여성이 아니라 촌스러운 용모의 15~16세 정도의 어린 여성이라 했다. 물론 전쟁고아가 일부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부분 좌익부역 혐의자들로 추정된다. 소위 빨갱이 혐의를 받는 상황에 무력을 갖춘 군인들에게 위안부를 거절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좌익을 구실로 손쉽게 끌고 올 수 있지 않았겠나. 이는 근본적 수치심을 건드린 처벌로, 좌익에 대한 폭력적 응징으로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위안부로 추정되는 몇 사람을 만났지만 ‘울음과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무덤으로 가져갈란다”며 다음 날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문 아무개 씨(1936년생)는 1951년 당시 16살에 원산 앞 바다에 있는 섬에서 여맹(女盟) 회의를 하다가 한밤중에 당시 원산 앞 바다의 여도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던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당했다. 그중 한 명에게 겁탈 당한 후에 강제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고 아이 둘까지 낳았다. 그를 어렵사리 수소문해 찾아갔지만, ‘전쟁 때 아이 낳고 고생하며 산 것밖에 없다’며 더는 할 얘기가 없다며 구술을 거부했다.

1950년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이 아무개(73) 씨는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또 다른 여성의 사례이다. 6·25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협력한 것 때문에 국군에게 체포된 이 씨는 다른 여자 의대생 3명과 함께 인계된 부대의 장교 4명에게 ‘배정’되었다. 이 씨는 다행히 자신을 불쌍히 여긴 한 장교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다른 3명은 그때 이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국가에 의한 성폭력이다

그렇다면, 한국군위안대를 도입한 주체가 누구인가? < 후방전서>에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장군들의 증언에 나와 있는 대로 당시 한국군 수뇌부의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음을 감안할 때, 일본군에서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군 수뇌부가 주도적으로 도입했음을 추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전시의 군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사실상의 국가다.

위안부는 일주일에 2회, 군무관의 협조로 성병검사를 받았다. 다시 말해 공창제나 일본군위안제도에서 성병을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국가는 여성의 몸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군인의 몸을 보호하는 ‘신체의 정치학’을 활용한 것이다. < 후방전서>에는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 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하여 단기 4287년(1954)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고 적혀있다.

“일각에서는 한국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공창이라 단정하고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에서는 공창이었을지 모르지만 여성 입장에서 한국군 위안부제도는 군에 의한 성노예제도다. 공창제가 국가가 여성의 성을 통제한 경우라면, 위안소는 전시라는 상황에서 국가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군이 운영의 주체다. 전쟁과 무력 앞에서 여성이 자립하거나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구조적으로 그 길밖에 열려있지 않을 때는 선택이 아니다. 그건 구조적인 폭력이다.”

김 교수는 또한 논문에서 “한국군위안부를 모든 인간의 역사에서 성욕과 성폭력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예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성욕은 존재했으나 성욕이 표현되는 방법이나 문화는 시대와 사회, 개체마다 차이가 있다. 성폭력이 두드러지는 사회도 있으나, 성폭력의 징후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사회도 얼마든지 있다. 또한 성매매를 은밀하게 인정하는 사회는 많을지라도 제도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회는 근대적으로 제한적이다. 그런 점에서 성욕이 있는 사회에 성폭력이 존재하다는 도식은 과도한 일반화라는 것이다.

일본군위안부와 같이 풀어야

2002년 한국군위안부 문제가 공식 제기되었을 때 한반도는 침묵했다. 당시 여성계, 진보남성 지식인, 사회학회 할 것 없이 대다수가 일본극우의 악용을 우려할 뿐이었다. 김교수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연결 짓지 말라 유무언의 압력이 가해졌다. 한국전쟁 당시 군위안부를 경험한 남성은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과 그런 것이니 그래도 나은 것 아니냐”고 변명했다. 이처럼 가부장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반공이데올로기가 동시에 작동해 한국군위안부의 진실을 가렸다. 김 교수는 “한국군위안부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단절적으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일본 극우세력들이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인정하는 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인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군위안부는 일본군위안부를 모델로 설립, 운영했기 때문이다. 또 냉전 친일파가 그 원조인 우리나라 우익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국익’을 앞세워 이를 미뤄둘 것이 아니라, 군이 작성한 공식문건이 있는 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도 나서서 말하지 못했다. 한국군위안부가 개인의 수치가 아니라 과거사 청산문제로 다룰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야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뿌리 깊은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이중적 성문화 탓이 크다. 위안부 피해자 문씨나 이씨처럼 철저히 고통 받았으면서도 그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분명히 어딘가에 더 있을 것이다. 진실규명에 의한 본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식에게 군위안부 자식이라는 멍에마저 씌우지 않으려는 심정 이해한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도 거의 70살 넘어서 자신을 드러냈고 무연고자이거나 아들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국가가 부끄러움을 말하는 자성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분들에게 고백을 요구할 수는 없다.”

구술사, 아픈 기억 슬픈 기록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에겐 사람이 나침반이다. 사람 속에서 성찰하면서 길을 찾는다. 현지조사와 구술사를 쓰는 그의 연구는 사람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가닿는다. “월남민들은 자기삶을 회고하면서 경험한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의도하지 않던 역사적 고리를 꺼냈다. 종군기자 이름을 떠올리는 등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문헌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고심했다. 기억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상처 깊은 말들을 하나둘 정리해나가면서 역사와 진실을 배웠다. 평화와 인권을 중심에 두고 한국전쟁의 교훈을 보편화하기 위해 힘썼다.

“요즘 냉전을 보면 민주주의 마비가 아니라 인간이성의 마비다.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하다. 행동 반성은 이성이 회복되는 과정이다. 과거는 더 이상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사 청산은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성숙한 국가를 원할 권리가 있고 만들 의무가 있다. 미래에 누구라도 약한 처지가 되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겠는가. 연구자로서 정직한 문제제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최근 천안함 사태를 언급했다. 가려진 상황에 대해 해외학자들이 중요한 연구를 발표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요즘은 바로 바로 전화가 와서” 국내 학자들의 침묵의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으니 말이다. 물론 연구자가 모든 역사적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이성이 마비되지 않도록 중요한 문제를 성찰하고 역사적 진실에 눈 뜰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본디 진실은 그렇다. 서늘한 진실. 빛바랜 진실. 쓰라린 진실. 비릿한 진실. 허망한 진실. 불편한 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할 수 없어서 진실이다. 지난 10년,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면서 여성들이 울 때면 그는 같이 눈물을 흘렸다. 속수무책을 슬퍼했다. “이런 극한적 상황에서 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픔이 더 크지만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아직도 수많은 트라우마와 같이 산다는 그. “내 몸속의 아픔은 다 못 나왔다”며 말끝을 흐린다. 몸속에 달각거리는 말들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며 시로 숙성됐다. 2005년부터 비공개 블로그에 쓴 시가 450편. 머릿속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받아적었다. 씻김굿 같은 시어들로 응어리를 풀어냈고 그러자 “마음이 튼튼해졌다”며 웃는다.

김귀옥 교수는 앞으로도 한반도만이 아니라 국제적 분단과 전쟁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중심으로 연구에 전념할 계획이다. 그가 이 시대에 던지는 시(詩)적 물음은 하나다. “공포와 폭력으로서 평화를 가져오려고 하지 말고, 평화로서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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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사람, 최종복, 정주영님 외 21명이 좋아합니다..

이병길 수유너머 보시는군요.

4월 5일 오후 10:46 · 좋아요 취소 · 2
..

김재성 아픈 진실…….

4월 6일 오전 8:40 · 좋아요 · 1
..

정혜윤 월남전에 이은 우리 군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네요,
지우고 싶은 결코 그냥 지워버리면 안되는???

4월 6일 오전 10:56 · 좋아요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