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시민은 누구?
한효석님이 최경송님의 상태를 공유했습니다.
6월 3일
폐부를 찌르는 글..
눈물난다…
용기 있는 글… 일단 공유를 걸어 넣고 두고두고 음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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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 괴로운 지방 선거다. 한국의 정치 지형은 기형적으로 쪼그라들었다. 여당은 집권 직후 닥친 국가적 재난에서 실력의 바닥을 드러내보였다. 제1야당은 정체모를 정치적 비전을 중얼거리는 개인에 의해 휘둘리면서 대안 부재의 현실을 폭로하였다. 세 개의 진보정당은 지리멸렬 그 자체인 가운데 무늬만 진보정당인 또 하나의 당은 늘상 그러하듯 출마 후 사퇴의 공식을 반복하며 제1야당에 구애하고 있다. 이 와중에 과천에서는 시민, 진보 계열에서 무려 6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다. 첫째로 시장 선거에 녹색당, 정의당 후보가 각각 출마했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유권자의 6%에 달하는 3,400여명이 배심원으로 모집되었다. 둘째로 각 세 명씩을 뽑는 시의원 양 선거구에서 ‘과천풀뿌리’ 소속 후보가 각 한 명씩, 정의당 후보가 각각 한 명씩 출마하였다. 후보 풍년이다. 과천의 지역사회 역량은 가히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것일까?
안타깝게도 물이 오른 것이 아니라 허세가 올랐다. 이 화려한 외양을 뒷받침하는 것은 과천 풀뿌리운동의 한껏 부풀어오른 허세이다. 세 명씩 뽑는 시의원 지역구에 우리편을 두 명씩 내보낸다? 새누리당이나 할 수 있는 짓이다. 다른 동네 사람들은 고사하고 같은 동네 사람들마저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웃한테 투명하게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다. 나 자신 이 허세에 기여해온 또 한 사람으로서, 과거 과천 풀뿌리운동의 활동가이자 과천 진보정당(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노동당)의 당원으로서, 과천 환경운동연합을 배경으로 당선된 전직 시의원(1998-2002)으로서, 선거일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나마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글을 쓴다.
‘과천풀뿌리’는 3월 22일, 120여 명이 참여한 ‘시민공천파티’를 통해 두 명의 시의원 후보를 뽑았다. ‘과천풀뿌리’가 주되게 표방한 바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 후보를 정당 공천에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시민이 직접 선출한다.
- 출마는 2회 이내로 제한하여 정치참여의 기회를 나누고 참여를 확대한다.
- 의원은 활동비 외의 급여를 의원과 시민을 잇는 활동과 사람에 투여한다.
두말할 것 없이 이 내용은 일본의 ‘가나가와네트워크’를 모델링한 것이다. 1980년, 일본 가나가와현의 ‘생활협동조합 가나가와’ 조합원들은 주민 22만 명의 서명을 받아 합성세제를 추방하는 조례를 제정하도록 현내 7개 시의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이 모든 시의회에서 모조리 부결되어버리자 시민의 생각을 직접 반영할 ‘대리인’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싹트게 되었다. 3년 뒤인 1983년, 생협은 통일지방선거에서 독자후보를 내 가와사키 시의회 의원을 당선시켰다. 가나가와네트워크는 22만명의 서명이 부결된 것에 대한 사회적 반발의 산물이었다. 과연 이 모델은 바다를 건너와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
결론으로 바로 가자면, 과천에서 이 시도는 외국의 사례를 맥락 없이 이식하려는 성급한 시도에 따른 부작용, 그리고 이에 더해서 애초 사례의 원천적 한계에 대한 성찰의 결여까지 겹쳐 최악의 상황을 낳았다. 이 시도가 안고 있는 숱한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 내 손으로 후보를 직접 뽑는다는 것이 획기적이고 새로운 것이라는 착각.
기성 정치권은 시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보를 일방적으로 공천해 왔던 바, 이제 ‘과천풀뿌리’에서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아 ‘폐쇄적 의사결정과정과 정치권력의 독점 해체’를 위한 일보를 내딛겠다는 것이다. 이 놀라울 정도로 순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선언은 정치공간을 기성 정치권과 시민진영으로 양분하면서 20여 년에 걸친 진보정당의 고투와 역사를 한순간에 지워버린다. 초기부터 ‘전당원의 직접선거로 모든 당직과 공직후보를 뽑아온’ 진보정당을 기성 정치권과 한묶음으로 도매값에 넘겨버린다. 내 손으로 후보를 뽑는 최초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자아도취가 사리분별을 흐려버렸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를 회원의 동의와 검증을 거쳐 정한다’는 자부심이 팩트에 눈감게 만들었다. 이미 시민의 손으로 후보를 뽑아온 진보정당의 정치적 실험들을 먼저 살펴보았어야 했다. 그 시도를 위해서 어떤 노력이 기울여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오류와 한계가 있었는지 겸손하게 공부부터 했어야 했다. 이 직접민주주의의 길을 ‘회원’은 걸어도 되지만 ‘당원’은 걸을 수 없다는 것인가? 결국 은연중에 ‘정당’과 ‘당원’에 대한 시민 진영의 오래된 적의를 텃세처럼 노출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또 다른 토론거리다.
둘째, 의제의 실종,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출마.
이러한 몰상식한 자부심 속에 ‘과천풀뿌리’는 정작 풀뿌리운동이 가장 주되게 표방해온 스스로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고, 개인의 정치적 진출보다 동네의 의제가 중요하지 않았던가? 가나가와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과정에도 선명히 드러나는 의제의 중요성과 그 의제를 담당할 대리인으로서의 후보라는 인식은 ‘과천풀뿌리’에서 통째로 실종되어 버렸다.
‘과천풀뿌리’의 형성과 후보 선정의 과정 그 어디에서도 동네 의제는 찾을 수가 없다. ‘공동체 활성화’니, ‘시민의 힘’이니, ‘생활인의 정치’니 하는 수사들을 의제라고 우기지 않는 한 말이다. 굳이 찾아내자면 ‘열린 공론장의 활성화’를 말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 있다, 그러나 이 공론장에서 무엇을 이야기하자는 것인지, 참여예산제를 동네의 어떤 문제를 위해 어떻게 활용하자는 것인지 아무런 논의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 어떤 정치적 욕구의 표현도 찾을 수 없는, 형식만의 민주주의를 앙상하게 되뇌이고 있는, 그래서 일반 주민들에게는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고개만 갸웃거리게 하는 기형적인 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 하다못해 수다 모임으로나마 과천의 주요 의제들을 끄집어냈던 2006년, 2010년보다도 후퇴한 꼴이다.
이러한 오류는 시장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증폭되어 재생산되었다. 각 선본에서 배심원단을 1,700명 이상씩 모아오는 기염을 토했으나 그 과정에서 풀뿌리운동의 원칙은 철저히 무너졌다. 동네 의제는 실종되고 정책적 차별성은 전무하였다. 한 명은 녹색당이고 한 명은 정의당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판단의 지표도 제공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치적 근거가 상실된 채 그저 개인적 친소관계와 의리라는 채무관계에만 매달린 경선 과정은 결국 그 어떤 시너지 효과도 이뤄내지 못하고 상처만을 남겼을 뿐이다.
셋째, 립서비스로 그친 지역당?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스스로의 원칙을 어긴 자연스런 귀결은 ‘지역정당 없는 대리인’으로 나타났다. 가나가와네트워크는 시민들의 ‘대변인’이 아니라 ‘대리인’을 원했다. 누군가가 시민의 대변인을 자처할 때 시민은 이 대변인의 수동적인 지지자로 떨어질 뿐이기에 시민 스스로가 자신의 대리인을 제도정치에 내보낸다는 개념이다. 이런 개념이 말장난에 그치지 않으려면 대리인을 통제할 강력한 ‘풀뿌리지역정치체’로서 ‘지역정당(local party)’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대리인을 통제할 지역정당은 선거 후로 미뤄졌다. 결국 몸통 없이 깃털만 날리는 꼴이다. 최소한 향후 지역정당의 건설 방법과 일정의 제시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마저 생략된다면 더 볼 것 없이 립서비스이며 습관적 식언에 그치고 만다. 결국 ‘과천풀뿌리’는 지역정당을 그저 현재의 ‘과천풀뿌리’에 의원과 의원의 보좌관을 더한 것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질 뿐이다. ‘과천풀뿌리’는 일본의 가나가와네트워크에서 이미 문서상으로, 또한 실천적으로 폐기된 ‘대리인’ 개념의 타당성을 거슬러올라가 따져보고 극복하는 과정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애초의 ‘대리인’ 개념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후퇴한 꼴을 보였다.
풀뿌리운동과 정치의 문제에 관해서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이호 전 소장은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몇 가지 결론적인 제언을 한 바 있다. 첫째, 전략을 명확히 해야 하며, 둘째, 지역사회의 발전전망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므로 선거가 코앞에 닥쳤다고 공동의 꿈과 비전과 계획도 없이 후보자를 추대하자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며 셋째, 지역사회에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라도 구체적으로 합의하고 도출해야 하며 넷째, 지방 제도정치권에 왜 꼭 진출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민들 스스로의 절실한 요구가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앞질러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며 다섯째, 후보의 상호 활동을 점검하고 통제하는 장치를 미리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 과연 ‘과천풀뿌리’의 지금까지의 행보는 이 평가의 잣대들 중 하나라도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가?
“조례 발의권이 아쉬운가? 주민이 주도하는 주민조례제정청구 운동을 먼저 펼칠 수 있다. 예산 심의권이 아쉬운가? 주민이 먼저 지역 예산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교육과 조직화가 필요하다. 정보가 아쉬운가? 주민이 주도하는 정보 공개 청구 운동을 더 열심히 펼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좀 더 쉬운 길을 더 편하게 선택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 대가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돌아온다. 물론 사안과 상황에 따라 이러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보다 쉽고 효율적인 것이 풀뿌리운동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2005. 이호 ‘풀뿌리운동과 지역정치운동’ 중)
이것이 과천 풀뿌리운동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해온 이음에서 누차 강조해온 바였으나 이음은 직무유기를 넘어서 이호 전 소장이 과천풀뿌리 후보들을 지지방문하면서 ‘과천풀뿌리’의 역주행을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음은 과천 풀뿌리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현재 녹색당의 과천 출신 핵심 활동가들과 맑은내방과후 주요 운영위원 다수가 이음에 속했거나 속해 있다. 나 자신 역시 이음과 맑은내방과후 초창기 멤버였고 상당히 오랜 기간 참여했지만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이음을 떠났다.)
넷째, ‘평범한 주부’, ‘순수한 시민’의 함정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나가와네트워크 자체에 내재해 있던 문제점, 그래서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노출된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더 진전시켜야 한다. 가나가와네트워크가 표방했고 한국의 풀뿌리운동가들에게 어필했던 ‘평범한 주부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본다. 이들에게 ‘평범한 주부’란 ‘기성 정치권’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지만 동시에 직업적 정치인, 노동조합, 진보정당을 포함한 정당 일반, 남성에 대립되는 새로운 정치의 주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주부’란 좀더 정확하게는 ‘도시중산층의 고학력 전업 혹은 겸업 주부’를 가리키고 있다는 지적이 과천에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들에게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혐오와 함께 위에 열거된 일반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시민으로서 동네에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좋은 일들을 하려다보면 필연적으로 정치와 닿게 된다, 그런데 진보정당은 뭔가 정서가 맞지 않다, 당위가 지나쳐 보이고, 불필요해 보이는 과정들이 많고 남성들이 판치는 권위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게다가 한국에서 진보정당이라는 게 얼마나 또 사회적 인기도 없이 찌질한가, 한편으론 굳이 또 당원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쑥스럽기도 한 일이다, 유별난 사람으로 비칠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이웃과의 사교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 이것이 ‘무소속’, ‘풀뿌리운동’, ‘시민후보’의 탄생 비화다. 이 정치적 입맛에 가장 맞는 그럴듯한, 언뜻 보기에 공평무사하고 자기희생적인 방식이 ‘출마는 2회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며 ‘의원은 활동비 외의 급여를 헌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참여의 기회를 나누고 확대한다는 명목하에 정치를 아마추어리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며, 의회와 시민사회를 잇는다는 명분하에 은연중 (주로 남성에 집중될) 생계형 직업 정치인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심성 자체가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이 역시 일군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정치적 취향, 정치적 기호가 아니겠는가. 문제는 이것이 ‘평범’이란 모호한 명제를 하나의 명분으로서, ‘시민’의 당위로서, ‘보편’의 이름으로서 이 정치적 기호를 공유하는 울타리의 안팎에 정당화될 때 발생한다. 예를 들면 과천에서 공동육아를 하고 대안학교를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마는 이것이 과천의 자랑거리로, 훈장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좋은 일도 누구나 응당 그에 참여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되면 그에 참여하지 않거나 또는 못하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소외시키지 않겠는가?
120여 명이 참여하는 ‘과천풀뿌리’가 자기들의 후보를 뽑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스스로를 하나의 부분으로 성찰하지 못하고 보편자로 정당화시키고 명분에 도취될 때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해지고 내부의 모순에 둔감해진다. 비판과 논쟁에 대해서는 “우린 사실 걸음마하는 아이와 같이 정치의식이 부족하다”는 엄살로 쉴드를 치고 “유쾌하고 즐겁게 해나가고 있으니 나름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해달라”는 뻔뻔스러움으로 대응한다. 그 명분 아래에서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회피되고 모든 상황은 합리화된다.
‘평범한 시민’이라는 방패는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악마의 망토다. 자신의 정치적 자아를 찾는 길에 패어 있는 가장 큰 함정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와 정치적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다. ‘평범한 시민’의 논리에 갇혀있는 한, ‘순수한 주부’ 타령을 하고 있는 한, 동호회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 노태우가 ‘보통 사람’이 될 수 없고 노무현이 그저 ‘바보’가 아니듯이, ‘과천풀뿌리’도 ‘평범한 시민’들이 아닌 것이다.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순간 그 누구도 ‘평범한 시민’으로 스스로를 특권화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부터만 과천의 민주주의는 다시 시동을 걸 수 있다.
다섯째, ‘과천’이라는 동네에 대한 성찰의 부재와 이에 따른 착시
이것은 과천 특유의 조건으로 인해 더욱 심하게 왜곡되었다. 과천은 전형적인 베드타운으로 생산과 소비, 주거가 분리되어 있는 공간이다. 상대적으로 비판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을 구성하는 사무 전문직 노동자들은 과천을 거점으로 생활하거나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녁 시간과 주말에는 이 작은 동네에 집중되어 있는 공동육아와 대안학교를 매개로 대학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친숙한 동아리 문화를 향유한다. 이 모순된 조건은 착시현상을 강화한다. 이 작은 동네에서 이 사람들만 뭉치면 뭘 해도 성공할 것만 같다. 바깥의 일반 주민, 새로운 사람에 대한 갈증을 느낄 필요가 없다. 유사한 정치적 기호를 공유하고 소비하는 것을 운동으로 착각해왔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더 끌어들이지도 못했고, 우리 안에 새로운 욕망을 더 불러일으키지도 못했다. ‘힘없는 민초’와 ‘수준높은 시민’의 입장을 편리한 대로 왔다갔다 하면서 때로는 엄살로 때로는 허세로 일관해왔다. 동네의 성격을 근간부터 뒤흔드는 본격 이슈에는 취약해진다. 과천의 지도와 풍속을 통째로 바꿔버릴 재건축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다. 중심상권을 강타할 이마트 입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한편, 하룻밤 술자리에서 과천은 프라이부르크도, 가나가와네트워크도, 포르투알레그레도 될 수 있다. 결국은 이 안주거리들이 선거의 메뉴판에까지 등장하였다. 엄살과 허세를 오가는 속에 정작 정치활동의 내용은 사라지고 가나가와네트워크의 앙상한 형식만 남았다.
과천을 정녕 유럽의 환경수도라 불리는 프라이부르크처럼 만들고 싶은가?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흑림에서의 강고한 반대투쟁, 그 눈물과 땀을 공유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재생에너지의 전문가로, 행정가로, 단체 활동가로, 사업가로 성장해나간 역사가 없는 한 그 비슷한 꿈도 꿀 수 없다. 90년대 내내 과천의 이슈였던 고압송전탑 싸움을 청계산 한복판에서 벌이면서 과천의 젊은이들이 현실에 단련되고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으로 고양되는 경험을 가졌다면 또 모를 일이다.
과천을 포르투알레그로처럼 참여예산의 성지로 만들고 싶은가? 그곳에서 참여예산은 우리 동네에 변소 하나를 지어 달라는 빈민들의 절박한 생존적 수요에서 출발했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배제되어온 사회집단들에게 예산 통제력을 부여하고자 분투해온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집단적 의지가 있었다면 벌써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이라는 반지하 세입자들을 집요하게 교육하고 조직하려는 노력이 투여되었을 터이다.
이번 선거를 가나가와네트워크와 같은 대리인운동의 첫 계기로 삼고자 하는가? 22만명의 서명으로도 합성세제 금지 조례를 관철시키지 못한 정치적 좌절감과 분노의 계기도 없이 말인가? ‘재건축 용적률 상향’이라는 자신들의 구체적이고도 오랜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 2010년 4명의 대리인을 선거에 내보냈던, 현 시장의 보금자리 주택사업에 대항해 집값을 사수하고자 1만 2천여 명의 서명을 모아 주민소환운동을 추진했던 ‘과천사랑’이야말로 과천의 보수판 가나가와네트워크이다. 인구 7만의 도시에서 3만에 육박하는 회원을 보유하고 수많은 정치적 논쟁과 실천을 회피하지 않으며 지자체와 시의회를 압박하고 있는 ‘과천사랑’을 넘어서지 못하고 어떤 대리인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상황에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대대적으로 펼친들 ‘과천사랑’을 위한 멍석을 깔아주는 서비스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구체적 욕망의 조직이 준비되지 않은 공론장의 활성화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여섯째, 정치와 사회운동과 정당에 대한 몰이해.
‘과천풀뿌리’도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며 한국적 정치 상황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야당이 죽을 쑤고 진보정당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고 시민운동이 10여 년 동안 준정당적 기능을 해왔던 왜곡된 정치 지형에 함께 갇혀 있다. 애초부터 이 나라의 풍속이 틀어진 탓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정치와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에 대해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이를 극복했어야 했다.
2000년 초반, ‘맑은내방과후’를 만들어낸 활동과 ‘과천마을신문’을 만들어 내는 활동 사이에는 ‘선의’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전자가 지역을 위한 봉사활동이라면 후자는 지역을 바꾸는 정치활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봉사활동과 정치활동을 마을운동이란 만만한 카테고리로 묶어버렸다. 우리는 맑은내방과후를 통해 교사를 뽑고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터전을 마련해 과천에 수많은 지역아동센터가 생겨나도록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과천마을신문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편집진을 세우고 재정 후원을 감당하는 데 실패하고 좌초시켜버리고 말았다. 과천마을신문을 운영함에 있어서 동네 운동은 명백히 진보신당이 투입한 전업활동가와 자금의 수혜를 입었음에도 오히려 진보신당의 후보에게 무소속으로 출마하라는 관성적인 권유와 텃세로 답했다. 동네에서 전업적인 활동가 한 명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동네 일이 그때그때 땜빵 식의 역할분담으로 감당되는 것에 허황된 자부심만 가졌다. 지역운동과 지역정치의 고리는 맑은내방과후부터 마을신문에 이르는 그 지점에서부터 끊어졌다.
“세상 모든 나라에서 노동조합이나 이익단체가 진보적 사회단체보다 천 배나 만 배쯤의 구성원을 가지는 것은 접촉 경로, 참가 동기, 활동 방식이 훨씬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노조나 이익 단체는 자각과 선의를 통과의례로 요구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민주주의 학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활동을 통해 권리 의식, 자구 조직, 집합 행동을 배우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동기로 조직된 보통 사람들이 비판적 시민으로 성장하는 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2013. 이재영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중)
비판적이고 능동적인 시민들은 깃발 밑으로 다 모여라라고 외치는 게 정치의 역할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과천 시민들이 어떻게 비판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계기와 조건을 고민하고 마련하는 것이 풀뿌리 식 정치의 역할이다. 왜 그들이 못 오고 있는지 그 조건을 따져보고 그들이 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치인, 정당인과 비교하며 ‘생활인’의 자격을 특권화해 그 원래의 의미를 편협한 의미로 대체한 뒤 정작 보편적인 생활인과 멀어져버렸다. 특정한 정치적 기호에 갇힌 편협한 준거집단으로 고착된 채 그에 갇혀버렸다. 과천에서 이루어져야 할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체시키고 후퇴시켰다. 관성적인 모임과 회의체계와 일하는 방식들이 원천적으로 우리 활동의 폭을 좁히고 직장 일과 가사노동에 쫓기는 진짜 생활인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막았지만 그에 대한 체계적인 반성은 경험하질 못했다.
이제 6월 4일 저녁이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무슨 결과가 유의미하겠는가? 내 손으로 후보를 뽑았다는 새로울 것 없는 자부심에 들떠있는 한, 당선되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의제가 실종되어 있는 한, 대리인을 통제할 지역정당이 립서비스에 그치는 한, ‘평범한 시민’이란 엄살과 뻔뻔스러움에 묶여있는 한, 과천에 대한 착시와 허세에 갇혀있는 한, 정치에 대한 무지에 빠져있는 한 과천의 풀뿌리는 푸르를 수 없다.
모두가 낙선하면 그 허탈감을 어찌할 것이며 한두 명이라도 당선되면 성찰의 기회는 또 어떻게 잡겠는가. 결과에 상관없이 각자가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구체적인 바램은 무엇이며 그 바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 동네가 처한 상황은 어떠하며 이 동네가 바뀔 수 있는 범위는 어떤 것인지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그 답을 가지고 다시 이웃과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아야 한다. 서로의 선의에 가리워진 빈틈과 아집과 허세를 겸허하게 지적하고 같이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없는 것, 동네에서 이룰 수 있는 일보다는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눠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나부터 생활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서로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미 벌여놓은 일들이나마 좀더 제대로 추스릴 수 있고 그 방향감각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바깥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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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남, 이경숙, 황정연님 외 4명이 좋아합니다.
김재성 길다.,…^^;;
6월 3일 오전 9:58 · 좋아요
오형민 부천에도 이런 고민과 시도가 있었더라면~
6월 3일 오전 10:17 · 좋아요 · 1
서성룡 음… 일부 공감, 동의도 되지만, 과장된 부분이 보이고,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성찰은 빠졌다는 느낌입니다…
6월 3일 오전 11:41 · 좋아요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