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바로 세우기, 개혁의 출발 -김정기
지난 95년 6월의 지방 자치 선거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4월 28일 아침 대
구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터져 100명이 숨지고 140명이 다치
는 초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국 방송 공사를 비롯한 방송3사는 그날 오전 7시 52
분께 발생한 이 대형 사고를 생방송하지 않았다. 더구나 방송 공사의 경우
고교 야구 중계 방송을 ‘한가롭게’ 내보내 시민들로부터 “이게 과연 공영
방송이냐.”는 항의가 빗발쳤다.
방송 공사가 아침 뉴스 시간에 이 사고 소식을 내보낸 뒤 시민들은 생방송
이나 속보를 기대했으나 무려 7시간이 지난 오후 2시 55분에 가서야 13분간
의 짧은 생방송을 내보냈으며 문화방송과 서울방송은 아예 낮 방송 허가를
공보처에 신청도 않고 오후 5시에 보도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런 방송 행태를 두고 시민들은 “공보처와 방송사가 대형 사고로 점철된
김영삼 정권의 신뢰성과, 6월 지방 자치 선거를 의식해 고의적으로 사고 방
송을 외면했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 날 신문사에 수백 통의 전화가 쇄
도했고 컴퓨터 통신에는 1천여 건의 격앙된 전문이 올랐다고 <한겨레>는 95
년 5월 3일치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대구 YMCA는 방송 공사가 가스 폭발 사건에 대한 방송을 태만히 했다 하
여 손해 배상 청구를 내는 것으로 아직 항의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이 사
건을 맡은 안상운 변호사는 공보처의 낮 방송 허가권을 문제삼아 무효 투쟁
을 벌이고 있다.
대구 가스 폭발 사고와 같이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친 참사가 발생하면 긴급
한 재난 방송이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비규환의 사상자 긴급 구
호와 헌혈 등을 비롯해 시신 처리, 유가족 안내, 피해자 후송 등 엄청난 공
공 서비스가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공영 방송이라는 방송 공
사가 이를 외면하고 ‘한가롭게’ 고교 야구 경기나 중계하다니.
내가 기억하기도 싫은 이 사건을 들추는 이유는 이런 방송 행태가 우연만
이 아니고, 바로 김영삼 정권의 직간접 언론 통제 구조에서 나올 수밖에 없
었음을 따지고 아울러 김대중 당선자에게 언론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서이
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마자 국내 방송과 신문들은 이른바 ‘신 용비어천
가’를 경쟁적으로 불러 대고 있다. 폭력 정권의 수괴인 전두환 씨를 두
고 ‘지장’ 이요 ‘덕장’ 이라고 추어올리고, ‘김대중 내란’ 사건에서 군사
법정의 사형 선고에 손을 들어주던 언론이 이제 김대중 당선자를 향한 역겨
운 ‘구애’를 벌이는 것이다. 바로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의혹 투성이인 김
대중 비자금 사건을 당시 신한국당 사무 총장 강삼재 씨가 터뜨렸을 때 기
다렸다는 듯이 검찰 수사를 촉구했던 언론이 아니던가.
우리가 김대중 시대를 맞아 언론 개혁을 촉구하는 이유는 언론 개혁을 동
반하지 않는 한 다른 부문의 개혁이 묻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것이 김
영삼 정권이 반면 교사로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예를 들어 김영삼 정
권은 처음 취임사에서 ‘어떠한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다짐하면서 북한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진보적 북방 정책을 폈지만 김일성
주석의 사망 뒤 주류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지금 나라가 거덜나는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이는 김영삼 정권이 길고
긴 개발 독재 체제를 개혁하기는커녕 그 말기적 부패 구조를 그대로 이어받
은 결과 필연적으로 맞은 종착역이다. 여기에는 주류 언론이 기득권 세력
과 야합해 ‘신 용비어천가’를 불러 대면서 이권을 챙기고 정작 언론이 해
야 할 사회·경제·정치에 대한 환경 감시 언론 기능을 외면한 점을 놓칠
수 없다.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경제의 기초가 튼튼해 외환 위기는 없을 것이라는
강경식 재경원 장관의 말을 앵무새처럼 전하기만 했던 ‘발표 언론’, 선거
때만 되면 공안 기관이 조작해 낸 김대중 용공 음해 정보를 대량 복제해 내
는 ‘매카시 언론’, 일년에 신문 용지 수입으로 무려 3억 5천만 달러를 쓰면
서도 거의30% 내지 50%까지 무가지로 찍어 쓰레기로 버리는 ‘쓰레기 언
론’, 이런 언론을 개혁하지 않고 과연 다른 개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출전: 김정기, [한겨레] 칼럼, 1997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