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은사님 만나뵙기 – 이경옥

제 목
(수필) 은사님 만나뵙기 – 이경옥
작성일
2000-05-30
작성자

이경옥(주부, 부천시 반달마을 동아 아파트)

5월이면 유난히도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다가
가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고교 은사님의 교훈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5월이
면 서울, 경기도에 거주하는 고교 동기생들은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5월 둘째
주 토요일에 해마다 부산으로 내려가곤 했다. 그런데 금년에는 선생님께서 서울
로 오신다고 한다. “너희들이 움직이는 것보다 내가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절
약이 될 것”이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내심 즐거웠다.

2시 비행기로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약속한 날 친구들과 함께 공항으로 갔다.
가는 길에 튜울립도 한 송이를 샀다. 낭비하지 말라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
나 꽃다발 대신 튜울립 한 송이를 준비하였는데, 그 의미를 선생님은 아실는지?
우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출구에서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자 우리들은 큰소리로 선생님을 불렀다. 창
피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 사람도 의식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뵙는다는
그 자체가 즐거웠다. 그립기만 하던 그 옛날 순수시대로 되돌아가는 것만 같았
다.

선생님과 함께 공항에서 전철을 타고 모임 장소인 오류동 어느 음식점으로 갔
다. 한 명 두 명 오더니 시간이 좀더 흐르자 9명이 모였다. 이런 저런 세상 살아
가는 이야기 보따리가 끝이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이야기도 주
로 아이들 교육 문제였다.

선생님은 20여 년 동안 교직에 몸담으시면서 느낀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들처럼
만 학교 생활을 한다면 교실 붕괴라는 가슴아픈 소리는 없을 텐데… 때론 교사
로서 환멸을 느낄 때도 있다며 술잔을 드셨다. 내 아이도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중학생이 되고 보니 다루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기에 선생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좋은 스승 아래 반듯한 제자가 있을 것이라는 친구의 이야기에 선생님께
선 용기를 얻는 듯 했다. 학습 교육도 중요하지만 인성 교육에 비중을 두는 학부
모는 과연 몇이나 될까? 내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지 속물 인간은 아닌가 싶어 고
개가 떨구어진다.

제자들이 건방지게 스승을 오라 가라 한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었는데, 그런
부담을 털어 주시려고 하셨는지 선생님께선 ‘이젠 같이 늙어가는구나’하며 웃으
셨다.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첫 부임 받으신 곳이 우리 모교였고 1학년 3반
담임이었다고 한다.

꿈 많던 여고 시절, 선생님과의 만남은 특별했다. 더욱이 총각 선생님이어서 우
리들 가슴을 더욱 설레게 했었다. 선생님께선 “교우이신”의 뜻을 아이들 가슴 깊
이 심어주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지막 술잔을 드셨다. 아이들 문제와 교육에 관
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듯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털 겸하여 선생님을 졸라서 술 한 잔 하기로 하고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