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와 ’40살’-김영진

제 목
’40세’와 ’40살’-김영진
작성일
2000-08-4
작성자

이름 : 김영진 ( seulk@chollian.net) 날짜 : 2000-08-04 오후 5:57:08 조회 : 158

’40세’와 ’40살’

『사십세』(창작과비평사)라는 이남희 씨의 소설집이 있습니다. 이 소설집 속에 「사십세」라는 소설이 들어있는데, 저는 이 소설 제목이 몹시 불만스럽습니다.
우리가 쓰는 숫자에는 우리 고유의 숫자말과 한자 숫자말이 있습니다. ‘하나, 둘, 셋, 열, 스물, 쉰’ 따위가 우리 고유 숫자말이고, ‘일(一), 이(二), 삼(三), 십(十), 이십(二十), 오십(五十)’ 따위가 한자 숫자말입니다.
우리 고유 숫자말이 한자 숫자말에 치여 우리 삶 속에서 쓰임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99(아흔아홉)까지는 우리 고유 숫자말이 잘 쓰이고 있습니다만, 100부터는 한자 숫자말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온[백], 즈믄[千], 골[만], 잘[억], 울[조] 따위의 우리 고유 숫자말들이 지금은 전혀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골’은 ‘골백번’이라는 말에 화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는 ‘하나’에서 ‘아흔아홉’까지도 이것들처럼 흔적만 남게 될까 걱정입니다. 모르죠, 나중엔 한자 숫자말까지도 안 쓰게 될지. 그 대신 ‘원, 투, 쓰리…’가 널리 쓰이게 될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탁구 경기 따위를 할 때 중학생만 돼도 ‘십일 : 십’ 하지 않고 ‘일레븐 : 텐’ 하잖아요.
사람도 그렇지만 말도 사랑이 없는 곳엔 붙어 살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 나이를 쓸 때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까요? ‘십 세’라고 말합니까, ‘열 살’이라고 말합니까? ‘사십 세’ 하고 ‘마흔 살’ 하고 어느 쪽을 많이 씁니까? 아직도 나이는 우리 고유 숫자말을 많이 쓰고 있고 그렇게 써야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나이 써놓은 걸 보면, 어김없이 ’40세’라고 해 놓았습니다. 이걸 우린 어떻게 읽습니까? ‘사십 세’라고 읽지 ‘마흔 세’라고 읽진 않습니다. 이렇게 써놓는 바람에 나이조차 한자 숫자말을 점점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만약 ’40살’이라고 쓴다면 어떨까요? 자연스럽게 ‘마흔 살’이라고 읽게 됩니다. 하기야 한자 숫자말이 막강해져 요즘엔 ‘사십 살’, ‘오십 살’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래도 ‘마흔 살’, ‘쉰 살’ 쪽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도 제 핏줄에게 끌리듯 말도 그렇답니다. 한자말인 ‘세(歲)’는 한자 숫자말과 붙으려 하고, 우리말인 ‘살’은 우리 고유 숫자말과 더 잘 어울립니다. 신문이나 잡지 따위는 줄여 적는 버릇이 있고 눈에 쉽게 들어오도록 하려고 아라비아 숫자와 단위 명사를 함께 적습니다만, 이렇게 적더라도 우리 고유 숫자말을 죽이지 않으려는 갸륵한 마음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아무개(40)’라고 사람 이름 뒤 묶음표 속에 나이를 쓰면서 달랑 아라비아 숫자만 써놓는 것도 우리 고유 숫자말을 죽이는 일이 됩니다. 사람 나이 쓴 걸 보면 많은 신문, 잡지가 아라비아 숫자만 써놓는데, 그렇게 써놓으면 읽는 사람은 우리 고유 숫자말로 읽지 않고 한자 숫자말로 읽게 됩니다. 아라비아 숫자를 어릴 때부터 한자 숫자말로 읽어온 버릇 때문에 우리 고유 숫자말로는 잘 읽지 않거든요. 그래서 꼭 ‘김아무개(40살)’이라고 써야 ‘마흔 살’이라고 읽게 됩니다.
’40세’ 대신 ’40살’을 씁시다. ‘사십 세’라 하지 말고 ‘마흔 살’이라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