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번부터 번호 받는 우리 딸 – 이희경

제 목
31번부터 번호 받는 우리 딸 – 이희경
작성일
2001-12-11
작성자

이름 : 이희경( ( ) 날짜 : 2001-12-11 오후 3:59:59 조회 : 181

31번부터 번호 받는 우리 딸

이희경(서울대 평생교육 박사과정 /수유연구실 회원)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처음 반장선거에 나섰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장은 남자이고, 여자는 부반장을 하는 거야.” 어린 마음에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는 선생님께 대드느니 부반장이라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 정치적인 꼬마였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엄마가 되고, 내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나는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는 어김없이 여자반장, 남자반장을 함께 뽑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들녀석 입을 통해서 가끔씩 듣게 되는 초등학교 풍경은 수십 년 전과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 못지 않게 활달하고 적극적이며 그리고 또 무척 똑똑했다.

남자반장 부모가 학부모들의 대표

1년에 한 번이나 아이 학교를 갈까 말까 하던 내가 소위 학교실정을 잘 알게 된 것은 그러니까 3년 전 학교운영위원회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학교민주화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해 보자는 가상한 뜻을 가진 평범한 학부모였던 내가 학부모총회에 가서 학부모대의원, 즉 학부모회 학급 대의원을 하겠노라고 스스로 자원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학부모대의원은 ‘관행상’ 남자반장, 여자반장의 엄마가 하는 것이라는 게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하여 반장은커녕 줄반장도 해 본 적 없는 우리 아이의 엄마인 내가 그 두 자리 중 한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자원을 하고 나서니,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결국 남은 한 자리는 남자반장 엄마가 맡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참 이상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부모들의 대표가 반장의 부모여야 하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똑같은 반장이라도 남자반장의 엄마가 여자반장의 엄마보다는 더 대표성을 인정받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벌어졌다. 입학식 날, 교실에서 선생님이 칠판에 아이들 번호를 쓰시는데, 아니 번호가 50번이 훨씬 넘어서는 게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한 반에 50명이 넘는다는 거야? 그게 아니었다. 남자번호는 1번부터, 여자아이들 번호는 31번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4월에 받아본 학교소식란에는 아이들이 회장선거를 한 결과가 실려있었는데, 1학년 14반 중에서 여자가 회장인 경우는 단 3명에 불과했다.

노동조합 포스터에서 이슬람 시위 군중까지

하긴 어떻게 보면 이런 일은 당연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른 역할모델을 보고 자란 우리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서 회장으로 남자를 뽑는 것이 어떻게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자선생님들이 훨씬 많은 초등학교 때도 교장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은 대부분 남자 선생님이고, 율동을 가르칠 때를 제외하고는 여자 선생님이 운동장 교단에 서는 일은 거의 없는데. 가장 진보적이라는 노동조합의 포스터에서도 투쟁하는 사람은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남자 뒤에서 아이를 업고 있는데.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정치브레인도 전쟁에 반대하는 이슬람 민중들의 데모대에도 보이는 것은 온통 남자인데. TV토론회에 나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문제를 지지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모두 남자들인데. 아, 아무리 남녀가 평등한 개방사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중요한 일들은 여전히 모두 남자들이 결정하는데…

우리 교육계에서 남녀평등의 교육원칙이 성립된 지도 50년이 지났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50년 전 그 때처럼 ‘남녀7세 부동석’의 이념에 따라 남녀공학이 풍기 문란을 조장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여자들을 교육시키는 목적이 부덕을 키워서 현모양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도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학교 내에서 남녀의 미묘한 권력 불평등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자립형 사립학교의 문제에는 모두 목청을 높이나 여자아이들이 31번부터 번호를 받는 문제, 여자아이들이 꼭 치마를 입어야 하는 문제에는 둔감한 정치의식을 갖고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것일 게다. 왜냐하면 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교육정책만큼 성적 불평등을 교묘하게 재생산하는 교육정책과 제도, 관행 역시 학교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 내에 이런 문제도 공론화하길 기대한다. (“교육희망” 2001년 11월 7일자에서 뽑음.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