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주항 부천실업고 교장

제 목
인터뷰 – 이주항 부천실업고 교장
작성일
2013-08-5
작성자

인터뷰 – 이주항 부천실업고 교장

부천실업고등학교는 1990년에 첫 신입생을 맞았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어린 노동자 야간 학교로 출발한, 독특한 학교였다. 그러나 이렇게 부천에 20년 넘게 450여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사람들이 주간 학교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탓에 부천에서 잘 몰라주는 학교이기도 했다.
그러다 2012년 11월 한국교육방송에서 ‘학교의 고백’ 시리즈로 “잘난 아이들”을 내보내면서, 전국적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런 학교가 얼마 전 소식지에 “2014년부터 주간학교로 바뀐다.”고 공고하여 그 속내가 궁금하였다.

2014년부터 주간 학교로 전환하려구요. 우리가 처음 학교를 열었던 1990년대는 이농 마지막 세대들이 도시로 왔어요.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을 떠난 세대였고, 그 자녀들이 대상이었죠. 지금 그 세대가 대부분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그런 상황이 잘못된 공교육과 합쳐지면서 아이들이 공교육에서 밀려나고 있어요. 이제는 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려구요.

우리 학교가 어린 노동자를 위한 학교였는데, 지금은 어린 노동자가 없어요. 이농한 어린 노동자는 더더욱 없고요. 사실 우리 학교가 야간이니, 지금 우리 아이들이 낮에는 공장에 다니거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 다니는 아이들이 태반이에요. 취직을 시켜줘도 금방 뛰쳐나오고요. 전교생 10%정도만 일하죠. 그것도 그나마 3학년이고, 1학년은 전혀 없다시피 합니다. 시대가 바뀐 거죠.

부천실고 야간 학교가 시대적으로 의미가 없어서 주간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고민했겠지만, 순발력이 있다. 학교가 설립 목적에 맞지 않는다면 문을 닫는 것도 방법일 텐데, 또다른 틈새 시장을 찾아나선 셈이다. “야간 대안학교로서 간판을 내리는 겁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학교는 다 변했어요. 15년 전부터 우리 같은 학교들이 주간으로 바꿔서, 지금 잘 되는 데는 수업을 유지하고 학교를 경영합니다. 깜짝 놀랄 정도예요. 우리 주변 학교만 해도 전교생이 1000명이 넘고, 300명 정도를 신입생으로 모집합니다. 어떤 학교는 중학교 3년치 생활부를 보고 무단결석이 많으면 받지 않을 정도라는 거예요.

우리는 놀랐다. 공교육 과정에서 상처받은 학생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고, 그렇게 해서 다시 맞이한 엄청난 학생들을 그 학교에서 제대로 챙길 수 있을까 싶었다. 이주항 교장도 학교 규모를 그럴듯하게 키우고 싶지 않을까? “부천실고는 개교 때부터 작은 학급, 작은 학교를 추구했어요. 주간으로 가면서 이 생각이 변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처음에는 주간으로 가면 성공 가능성이 있을까 싶었어요. 학교는 어쨌든 경영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도 경영이 안 되어 교사 인건비가 적을 수밖에 없어요. 일반학교 60%나 될까? 아마 그보다도 더 적을 거예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다른 학교처럼 많은 학생수를 유지하지 않고, 학교로 사업을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요. 지금 교사 15명에 학생 110명이라는 것은 유럽 수준도 뛰어넘은 겁니다. 흐흐흐. (맞다. 보통 인문계 학교가 교사 1인당 학생 15명쯤 된다.) 한 학급 20명, 전교생 120명을 계속 유지할 거구요. 뚜껑을 열어봐야죠.

물론 우리 학교를 대안학교로 알고 오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어요. 300명이라면 290등에서 300등 애들이 오는 거고, 기숙사를 보고 오죠. 입시 경쟁에서 완전히 내몰린 학생들을 위한 학교죠. 어쩌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러 오는 거죠. 그것도 정당한 요구다. 입시경쟁 교육이 이런 식으로 가속화하니까 아이들이 파업한 거라고 봐요. 학교에 의미가 없다는 식이죠. 그 욕망도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하죠. 그런 대안학교가 가능할 것인지 우리가 시험대죠. 틈새가 아니라 좀더 지켜봐야 할 거 같아요.

부천실고가 앞으로 20년, 30년 뒤에는 다른 대안학교보다 더 훌륭한 도시형 대안학교로 자리를 잡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주항 교장은 이우, 간디, 푸른꿈 고등학교처럼 중산층 욕구를 해결하는 학교가 아니라며, 정 붙인다면 빈민형, 주변부 대안학교라고 했다. “1989년에 왜 이런 일을 시작하셨어요?”

1961년생이니까 스물 아홉 살때 시작했네요. 그전에 공장 다니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어린 나이에 낮에 공장 다니고 밤에 공부하는 친구들이죠. 교사가 괜찮으면 재미있겠다. 교사가 좋은 사람이라면 이 아이들 성장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산업화 막바지라서 그때만 해도 이농한 세대들이 공장에 다니니까, 노동자들에게 전인 교육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이 있었으면 했어요. 그때는 고등학교를 못나온 공장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것으로 산업체 부설학교와 야간 특별학급이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우리가 젊으니까 그때로서는 새로운 시도로 시작한 거죠.

사실 제가 운동권 출신이죠. 운동권 친구들이 그때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공장에 다녔잖아요? 저도 공장에 꽤 다녔어요. 위장 취업으로 공장에 다니며 그런 아이들을 만난 거죠. 그때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 많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특히 우리나라는 학력에 대한 기대가 많잖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그런 애들이 꽤 되더라구요.

아니, 뭐라고? 언제나 웃음이 많아 사람 좋고, 심하게 말하면 허술해 보이는 이주항 교장이 한 때는 운동권? 그리고 위장 취업? 운동권 출신이 공장에 다니다가 야학을 시작했다고?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 한다고? 정치권에는 남보다 높이 서려고 초심을 잃고 과거 운동 경력과 민주화 투쟁을 팔아 치운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아이들을 위해 야간 학교를 열었다고?

서울 신림동에 겨레터 야학이라고 있었어요. 1980년 한양대학에 들어갔는데, 선배를 따라 그 겨레터 야학에 갔어요. 제가 야학 막내에요. 왜냐하면 1980년 광주 항쟁이 있고, 바로 해체됐거든요. 그때 야학에서 세미나하고 기웃기웃 하는데 해체된 거죠. 야학에 관여했지만, 야학 교사는 아니었어요.

그 후로 계속 학생 운동을 한 거고, 대학 졸업 후 공장에 다니다가 그런 영감이 떠오른 거죠. 그런 공간이 있었으면 재밌겠다 그랬던 거죠. 그걸 실천해보자 해서 1989년에 시작한 거구요.

1980학번으로 대학 1학년 때 야학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야간학교가 평생 붙들고 가는 업보가 되었단다. 내년이 25년인데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야간학교 또는 작은학교 교장이 어린 이주항의 꿈이었을까?

지금 하라고 하면 우스개 소리로 진짜 하기 싫다고 하죠. 보람도 있었는데 어렵더라구요. 멋모르고 하는 거죠. 고등학교 때까지 내 꿈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가부장 문화, 아버지 가치관에 따라 엄하게 살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물 만난 고기 식이 되었어요.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서 그때부터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돼야지 했죠. 대학에 와서 부모님 세대와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된 거죠.

그래서 운동권이 되고, 노동 현장에 갔는데,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깜짝 놀랐어요. 책에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를 묘사하잖아요? 제가 공장에 가서 장시간 노동을 해보고 “노동의 훌륭함, 노동의 진정성”을 보게 되고 노동자 삶을 보면서 노동을 실체로 느낀 거죠. 깜짝 놀랐어요. 딴 세계에서 사는 것 같더라구요. 그 전에는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서 왔다갔다 하면 물건이 만들어지는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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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건축 일을 하셨다. 어려서 나는 목수와 미장이, 막노동자를 예사로 만났고, 콘크리트와 벽돌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을, 사람이면 당연히 하는 것으로 여겼지, 천박하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주항 교장은 자신의 삶과 아주 다른 세계를 만났으면서도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는 심성을 지녔다. 낯선 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며, 잠깐 인연이 있었던 야학을 떠올려 기꺼이 노동자들 친구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제 아버지가 공군 장성이었어요. 학생 운동 시절에 사람들이 그걸 알게 되면 놀라죠. 예비역 장성 아들이 데모를 주동하고 감방에 가니까요. 우리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읍장이었나 봐요. 아버지가 그때 열아홉 살로 군대를 가야 하는데, 읍장이니까 징용이 떨어지면 딴 사람부터 보내고 자꾸 미루다가 휴전이 되면서 아들을 공군 장교로 보냈어요. 그때는 직장이 없으니까 제대를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별까지 달고 나오셨어요.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니 애비를 어떻게 해서 군대 안 보내 살아남았다고 쭉 말씀하시는데 저는 굉장히 부끄럽더라구요. 어떤 나라든 사람들이 정직해야 되지 않나? 매일 도망 다녔으면서 이제 와서는 군장교로 갖은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맞지 않다. 그 뒤로 기존질서에 대한 회의, 아버님에 대한 반항 이런 것이 많았죠. 저는 인생 절반 정도를 아버지라는 기존 가부장적 질서와 싸웠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계신데, 우리 딸하고 가면 “네 할아버지는 여기에 정정당당히 있을 분이 아니다.”라고 하죠.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대우받아야 하는데,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요. 내가 하고 있고, 밟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죠. 그런 것들이 이런 일을 하고 또 계속하는 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주항 교장이 유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중3 어린 나이에 부끄러움을 깨달았다는 것도 놀랍다. 말하기 어려운 가족사였다. 야간학교를 꾸려오면서 어째서 지난 20년 넘게 흔들리지 않고 올 수 있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국립묘지 지하에 있는 아버지가 굉장히 불편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묘지 입구에서 아들 발소리가 들리면 “저 놈이 또 오는구나.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시겠다. 흐흐흐. 아버님! 그래서 부모는 언제나 자식 앞에서 떳떳하게 사셔야 합니다. 끝으로 졸업생들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써달라고 하였다.

졸업생들에게,
처음에 학교를 꾸릴 때 이곳에 미래가 있는 건지 너무 회의스럽고 매일 힘들었다. 너희들도 힘들었겠지. 보람도 있었지만, 어수선한 것이 많았는데, 그렇게 1회 졸업하는 친구들이 교실문을 붙들고 울면서 안 떠나겠다고 하던 모습이 학교를 다시 여는 동력이 되었단다.
우리가 남다른 학교라서, 너희들과 같이 신입생 모집 포스터도 붙이러 다니고, 같이 일하고 같이 학교를 만들어 왔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는구나. 우리 학교의 건강한 것이 지켜질 수 있도록 너희들이 지켜봐주고 참여했으면 좋겠다.
보잘 것 없는 학교이고 쉽게 알아주는 학교가 아니지만,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체제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낼 수 있고,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학교가 됐으면 좋겠다. 기쁠 때 외로울 때 서로 위로받고 위안해줄 수 있는 관계가 지속되는 학교였으면 좋겠다.

정규 3년을 마치지 못하고 헤어질 때가 가장 가슴이 아프고,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아이가 돌아와서 과정을 마칠 때 가장 반갑다고 한다. 그런 이주항 교장이 “잘못된 체제에 균열을 내자”고 할 때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췄다.
나도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공교육에서 내몰린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이런 짐을 지고 가는 부천실고 선생님들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우리가 공원 하나를 더 만들고 건물 하나를 더 세우면서, 이런 작은 학교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후손들에게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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