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손인환 원장

제 목
인터뷰- 손인환 원장
작성일
2013-10-7
작성자

한효석이 만난 사람 6 – 손인환 ‘손인환 한의원’ 원장

장애인은 ‘놈’이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담배를 끊으라고 하면서 나는 피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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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인환 원장은 스물여덟 살이던 1990년, 원미동에 ‘손인환 한의원’을 개업하여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으나,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이런저런 부천시민단체에 많이 관여하면서 한때는 정치 지망생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지금 ‘부천 외국인 노동자의 집’ 소장이기도 하다.

“소장 임기가 3년인데, 벌써 절반이 지났네요. 외국인 노동자의 집은 1995년에 생겼어요. 미얀마, 네팔 등지에서 노동자가 산업연수생으로 왔는데 차별대우, 임금체불, 폭언, 폭행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였어요. 그걸 부천 시민 사회에서 도와줄 때 그 노동자들을 잡으러 오니까, 영담 스님이 석왕사에 쉼터를 만들어주었어요. 그러다 2000년에 근로자복지관이 완공되면서 3층에 자리를 잡았어요.
20년 가까이 운영되면서 지금은 자원봉사자도 많이 오고, 사회복지사 인턴 실습도 하면서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지요. 주 중에는 대부분 직장 때문에 못 오고, 일요일에 몇 백 명이 옵니다. 일요일에 한방, 양방, 치과 무료 진료를 하거든요. 더 큰 질병은 순천향 병원과 성모 병원에 보내요. 우리가 증을 만들어 주면 그곳에서 치료비를 절반 가까이 감면해줍니다.”

- 부천에서는 시민단체가 일찌감치 외국인 노동자에 관심을 둔 탓인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편이다. 외노의 집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처음 무료 진료를 할 때도 경기도청에서 엑스레이 차량을 지원하고, 시 보건소에서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대주었다. 지역 사회 의사들도 많이 참여했다. 지금은 서울대 의과 동아리, 경희대 치과 동아리 등이 상시적으로 의료 봉사를 한다. 그래서일까, 부천 지역 정서도 외국인 노동자라고 특별하게 편견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편견이 무섭죠. 아직도 백인을 보는 눈과 흑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죠. 과거보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우선 마음을 열어 서로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다음 제도를 정비해야죠. 외노의 집에서 그런 사업에 주력할 겁니다.
지금도 산재가 많아요. 손가락이 잘리거나 벨트에 감기는 식입니다. 우리에게 연락하면 병원과 바로 연계해줍니다. 사업자와 벌어지는 갈등은 같은 건물에 있는 노총에서 도와줍니다. 정기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에게 방독면 쓰는 법, 스트레칭 하는 법처럼 안전 예방과 임금, 건강, 고용 같은 것을 교육하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이곳에 오고 싶어도 멀어서 못 오는 사람이 많거든요. 미취학 어린이 한글 교실이 있어도 아이 혼자는 못 와요. 외국인 부모와 자녀를 이곳에 태워올 버스를 운영했으면 좋겠어요.”

- 하고 싶은 일을 해서인지 행복해 보인다. 이야기하는 중에 탈북자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탈북자는 가족을 북쪽, 또는 중국에 두고 온다. 그래서 위장 장애와 불면증이 대표적인 증상이란다. 그런저런 사정에 귀를 기울여 치료를 해주다보니 탈북자들조차 이 한의원을 국가가 지정한 무료 진료소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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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에는 연고가 전혀 없었어요. 우연히 만난 거죠. 1989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는 분이 소개하여 경기도 광주 어느 한의원에 갔어요. 그 곳 원장님이 건강이 안 좋아 그 분 대신 환자를 봤어요. 6개월 뒤 그곳에서 나와 인천에서 일했는데 그때 오며가며 부천을 지나다니다가 지금 이 건물을 얻었어요. 여기에 오래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이게 내 건물인 줄 알아요. 20년 넘게 월세 내고 삽니다.”

- 희한하다. 젊은 한의사가 원미동을 선택하여 정착했다. 가게를 얻거나 주택을 마련할 때 사람들은 장사가 잘될 것이라든지, 좋은 학교 옆이라서 몇 년 뒤에 어떻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소설가 양귀자가 <원미동 사람들>에서 묘사한 것처럼 원미동은 예나 지금이나 소시민들이 사는 동네이다. 한의원에 든든하게 돈줄이 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 각 대학 젊은 한의사 중에서 사회 문제, 학내 문제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리고 뿔뿔이 흩어지더라도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처럼 건강한 보건 의료 단체를 만들자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1989년 ‘민중건강권을 위한 한의사 모임’을 만들었다가, 그 다음해 ‘참된 의료실현을 위한 청년 한의사회’ 창립대회를 하죠. 그때 창립대회 구성원 100여 명이 지금 자기 지역에서 열심히 삽니다. 한의원 문턱을 낮추고, 주민들과 아주 작은 문제까지 상담하며 질병을 예방하고,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고요.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었어도 변하지 않고 잘 살아요.”

- 손 원장은 한의사로서 얻을 수 있는 지위와 재산보다 열심히 살고, 반듯하게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나 보다. 과거에 운동권 대학생들이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자와 함께 호흡했지만, 끝까지 노동자로 살지는 않는다. 갈 길이 따로 있는 것을 알면서 서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두 계층이 아름답게 연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손 원장은 이미 그때 주민으로 동네 사람과 더불어 여기까지 올 것을 상상했는지 모른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빌딩 있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운동권 대학생은 아니었어요. 그게 뭔지도 몰라요. 1983년에 원광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교정에 조그만 나무 비석이 있더라구요. 임균수 열사라고 쓰였는데, 1980년 5.18 광주항쟁때 한의대 2학년이었고, 광주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해마다 5월이면 임균수 열사 추모식과 광주항쟁 기념식을 했어요. 전라도이고 1983년, 1984년이니까 열기가 대단했죠.

그런 분위기에다가 선배들까지 좋았어요. 괜찮은 선배, 재미있는 선배가 많았어요. 우리에게 늘 물었죠. ‘왜 공부하냐? 공부를 하더라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라. 너희들은 의료인이 될거다. 환자가 병이 왜 생겼을까를 봐라. 개인 문제도 있지만 환경, 사회, 정치, 노동, 먹거리, 사회 변혁에 관심을 가져야 병을 제대로 고친다.’ 선배들의 이런 말에 나는 혹 했어요.
그 말이 맞잖아요? 그래서 의료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죠. 농촌 의료 봉사도 많이 갔어요. 주말만 되면 익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갔는데, 저녁 때는 농촌 실정, 농촌 병, 농촌 환경을 토론하면서 점점 사회 문제와 의료 문제에 눈을 떴죠. 내가 장애인이라서 장애인 문제에도 관심이 컸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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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남 4녀의 다섯째였는데,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이 되었단다. 부모님은 8남매를 돌보랴, 장애인 아이를 키우랴 제도적으로 갖춘 것이 없는 시절에 몸 고생, 마음고생이 대단했을 것이다. 이애는 장애인이라서 제대로 배워야 산다. 자칫하면 자기 앞길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손인환을 한의대에 보냈을 것이다.

“그럴 거예요. 침이나 한방에 관심도 많았어요. 다리가 불편해도 연 날리고, 팽이 치고, 딱지 치고, 자전거 타고… 할 건 다했죠. 다치기도 많이 다쳐 침 맞으러 한의원에 많이 다녔거든요. 한 어르신이 제 부러진 팔을 맞추고 침을 놓는데 그때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진로를 이쪽으로 확실히 결정했지요. 한의원 느낌을 아니까요. (흐흐흐)
원광대학교에 들어간 것은 잘한 겁니다. 원불교 재단이 세운 대학교이지만, 종교의 자유도 있고 굉장히 자유로웠던 대학이에요. 장애인 모임도 있었구요. 그 모임에 들어가서 장애우 운동을 했어요. 그때까지는 장애자라고 불렀어요. 나중에 장애인으로 바꾸죠. 놈자를 사람 인으로 바꾼 겁니다. 놈이 비로소 사람이 된 겁니다.

장애인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열심히 뛰었죠. 전국 지체 장애인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어요. 서울 대학생들과 교류하고 워크숍도 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요? 서울 어느 대학교에 입학한 장애인이 대학 시설에 적응할 수 없어서 자살했어요. 그때 이 일에 대대적으로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학교와 회사, 공공시설에 장애인 편의 시설을 만들고 엘리베이터를 놓고, 문턱을 없애기 시작했죠. 그때에 비해 지금은 많이 좋아졌죠.”

- 그랬구나. 대학에서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웠구나. 그래서 낯선 부천에서 한의원을 차리기 무섭게 시민단체와 시민 활동가를 찾았겠지. 그러고도 손 원장은 궂은 일에 묵묵히 앞장 서되,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최근에 추진했던 부천의료생협 준비 모임에서도 의료인 대표로 추대되었으나 손 원장은 울타리 노릇이면 충분하다며 사양하였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지만 나설 자리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 것도 손 원장 매력이리라. 만년 대표에 만년 사무국장으로 굴러가는 단체도 많은데, 쉽지 않은 일이다. 오죽하면 시민단체 대표직도 임기를 두되 연임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까?

“일찌감치 대표를 많이 해봤어요. 청년한의사협회에서도 대표를 했고요. 부천시민연합도 30대에 공동대표를 했죠. 30대, 40대가 지역에서 중심을 잡으면서 그 위 세대와 조화를 맞추는 것이 좋다고 봐요. 그 나이가 가장 활발하게 일을 잘 합니다. 물론 젊을 때는 보이는 것만 보죠. 나이를 먹으면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요. 안 보이는 것이 서서히 보여요. 마흔아홉까지도 안 보이는데 오십만 넘으면 딱 보여요. (흐흐흐, 하하하)
40대한테 그러죠. 여기에 가만히 있어도 다 본다. 당신들이 대표도 하고 집행위원도 해라. 우리가 임원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잘 할 거다. 그리고 우리가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고, 늘 같이 고민해온 것인데 외면하지 않는다. 더구나 부천의료생협은 2차 진료를 하는 200병상 병원을 꿈꾸는 건데, 꼼꼼하게 천천히 힘을 모으자고요. 40대가 잘할 겁니다.”

- 우리에게는 40대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기성세대는 40대를 어리다고 하면서 못미더워 한다. 50대는 말할 것도 없고 나 아니면 안 된다고 70대가 아직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손에 쥔 것이 있는 노인은 생생하고, 모든 것이 열악한 젊은이는 기죽은 사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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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심사요? 외노의 집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다문화 관련 단체가 많이 생기면서 우리 정체성이 모호해진 부분이 있어요. 외노의 집이 제 자리를 찾고 다음 소장이 일할 기반이 되면 바람처럼 사라져야죠. 그런 면에서 올해 외노의 집을 법인으로 등록하고 개소식을 한 것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 걱정됩니다.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고, 고령자가 많은데다, 주로 폐휴지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이고요. 중복 장애인들도 있고요. 몇 달 동안 발길이 끊어져 확인해 보면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나는 장애인이라도 한의사라서 먹고 사는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면 개인 봉사로 한계를 느끼고요.

저요? 지금 새삼스럽게 병원을 더 키울 것은 없고요. 지금처럼 월세 잘 내고 물 흐르듯 살면 됩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요. (흐흐흐) 요즘 담배를 안 피웁니다. 의사 말은 들어도 의사 행동은 따라 하지 말랍니다. 환자들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하면서 나는 피웠거든요. 이번에 끊었어요. 한의사도 아프냐고 하는데 저도 옛날 같지 않아요.”

– 손인환 한의원에는 없는 사람이 주로 온다. 우리가 방문하기 전에도 탈북자 두 분이 왔다 갔다고 한다. 어쩌면 운명적으로 돈이 안 되는 곳을 선택하여, 돈 못 벌 상황을 만들어 유혹에서 벗어나 반듯하게 살려고 했는지 모른다.
‘자발적 가난’이라고 표현하던데, 돈 때문에 사람 변할 가능성을 스스로 막은 셈이랄까?
이야기하는 내내 손 원장은 ‘편견’을 자주 언급하였다. 알고 보면 손 원장도 외국인 노동자처럼 장애인이라는 편견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청년 손인환에게 신체 장애가 아픔이라면 전라도, 광주항쟁, 원광대학교는 긍지인 것 같다. 아픔과 긍지가 일찌감치 손 원장을 성숙하게 하였다. 그러고 보니 서른 살이 되도록 전라도가 키우고 원광대학교에서 길러낸 인재가 20여 년 전에 부천으로 넝쿨째 굴러온 셈이다.

글 한효석/사진 임민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