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무엇인가?
유상태 목사 – 지구마을의 어떤 분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을 ‘이(理)’라고 부르고, 어떤 분들은 법(法), 또는 공(公)이라 부르며, ‘Cosmic Mind’나 ‘Cosmic Principle’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무엇인가?” 물어봅시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하나님 믿는가?’보다 ‘하나님 이해하는가?’ 더 중요
류상태 ryust@hanmail.net
오늘은 ‘기독교의 전통 신관, 이대로 좋은지’ 교우님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신 하나님에 대해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들이 여전히 강조하는 ‘배타적 유일신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의식을 넓혀가야 좋을지 솔직한 생각을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1. ‘제가 만난 하나님’과는 너무나 달랐던 ‘교리의 하나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제가 처음 기독교를 접했을 때의 경험을 잠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35년 전에 ‘저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저의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즉 ‘존재하시는 그대로’ 만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신적 존재를 만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나고 체험한 신은 ‘그 사람이 주관적으로 인식한 신’일 수밖에 없으며, 그 체험되고 인식된 신은 사람마다, 또한 종교전통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만난 하나님 역시 ‘절대객관의 하나님’이 아니라 제가 인식한 ‘저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인식한 저의 하나님만이 옳고 다른 분들이 만나거나 인식한 하나님은 틀리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하나님을 교우님께 소개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님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가듯이, 저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생각이 많이 달라졌는데, 그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교우님들의 신앙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무신론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으로 철학을 전공했던 저는 종교의 세계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당시 만났던 예수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을 통해 만났던 따뜻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저의 첫 인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막 입문한 기독교 초년생으로서 신앙동아리를 통해 배운 기독교 교리가 너무나 배타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종교철학>이나 <인도철학> 등 철학과 수업을 통해 접한 이웃종교는 의외로 너그러웠습니다.
당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손에 잡은 꾸란(보통 ‘코란’이라고 발음하지만 ‘꾸란’이 원음에 가깝고 무슬림도 그렇게 부르기를 원하므로 ‘꾸란’으로 통일하겠습니다.) 해설서에서 “너희의 종교는 진실로 하나이니라.”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당혹감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속했던 신앙공동체는 이슬람을 사교로 배척했지만, 꾸란은 우리 기독교인을 경계하면서도 ‘경전의 백성’으로, 즉 형제종교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 담긴 내용이 우리 기독교 성서보다 상대적으로 너그럽다고 느꼈을 때의 혼란과 두려움은 당시 기독교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근본주의에서 시작한 대학시절의 저의 신앙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포용주의로,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로는 다원주의로 이동하였고, 이후 한국 교회가 우상으로 치부하는 이웃종교들이 기독교 못지않은 영적 매력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걸 확인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2. ‘성서의 하나님’은 이삼천 년 전 고대인이 인식한 하나님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삶의 방향을 정하고 신학을 전공하는 길로 들어섰을 때 본격적으로 찾아온 그 변화는 저 스스로 보금자리를 깨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험한 세계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기에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제가 몸담고 있던 보금자리 또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저는 결국 오랜 두려움과 망설임 끝에 한 걸음 한 걸음씩 다음 세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래 문장은 근본주의 신앙교육을 받던 대학시절에 만난 성경말씀으로 저에게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아픔을 안겨주었던 말씀입니다.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모조리 쳐죽이셨다. 왕위에 오를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땅굴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에 이르기까지 다 쳐죽이셨다.” (출애굽기 12:29, 공동번역).
“그 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야훼께서는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실 수밖에 없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처음 난 것은 모조리 죽이셨다.” (출애굽기 13:15).
이 본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저는 ‘사실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가 갖는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신문기사처럼 객관화되어 기술된 성서본문은 저의 머리와 가슴을 혼란과 당혹감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자신이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지만, 파라오 한 사람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을 죽이는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야훼께서는 파라오로 하여금 또 고집을 부리게 하시었다.”(출애굽기 10:27)는 말씀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파고들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 주체는 파라오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파라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저에게 기쁨을 주었던 기독교 신앙은 이제 고통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신 ‘따뜻한 나의 하나님’도 저의 마음에서 사라졌습니다. 대신 파라오의 마음을 그렇게 조종해놓고는 당신의 섭리에 거역할 능력이 없는 불쌍한 그에게 책임을 묻고 벌을 주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제 마음을 가득 채운 채, 혼란과 두려움으로 아파하는 저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의심해선 안 된다.”고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서를 차례로 통독해가던 저는, 모세가 레위지파 사람들에게 살인면허를 주어 자기 동족 삼천 명을 몰살시켰다고 기록된 본문도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죽이라고 모세에게 명령한 이유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겼기 때문이라고 성서본문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의 명령에 절대순종하지 않으면 이방민족 뿐 아니라 자기 백성들까지도 몰살시키는 ‘성서의 하나님’을 넘어,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 희망과 빛을 주셨던 ‘저의 하나님’을 다시 찾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납고 반인륜적인 하나님에 대한 기록들은,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즉 고대인의 ‘신인식의 한계’를 정직하게 반영합니다. 출애굽기의 기록 또한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믿고 해석했음을 반영하는 것일 뿐 그 기록 자체가 객관적 사실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이삼천 년 전입니다. 그때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정직하게 자신들의 신앙으로 그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피해자로서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징계는 철저하고 가혹할수록 정의롭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자신과 동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강대국 지도자 파라오는 절대악일 수밖에 없었고, 그를 가혹하게 징계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천 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런 원시 유일신 신앙과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는) 편협하고 반인륜적인 기록들을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슬픈 현실이 우리 한국 교회 교우님들의 자유로운 신앙과 삶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무오설이라는 오래된 교리에 매여 이웃종교와 문화를 부정함으로써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그분들의 삶의 자리를 실제로 파괴하기까지 하는 무례한 행동은, 그것이 비록 일부 극단적 성향을 가진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예수사람들이 함께 책임을 지고 반드시 극복해내야 할 우리 한국 교회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3. ‘변치 않는 신앙’은 스스로를 가두는 것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들은 ‘변치 않는 신앙’과 ‘의심 없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장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성장하기 마련이며 성장한다는 것은 계속 변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변치 않는 신앙’과 ‘의심 없는 신앙’은 곧 부패한 신앙이 되고 결국은 죽은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산보다도 더 크셨습니다.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저의 체험에 의하면, 그때 아버지는 늘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올려보아야 겨우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산은 그렇게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원근의 개념이 형성되기 전의 어린 저에게, 아버지는 틀림없이 산보다 크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의 체험과 고백이 객관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제가 아버지보다 더 키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그렇게 크신 분도 아니었지만, 그리 멋진 분도, 너그러우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어느덧 제 앞에는 어린 시절의 슈퍼맨 아빠는 사라지고 세월에 지친 한 초라한 노인이 다가와 계셨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셨습니다. 감히 키로 잴 수 없는 깊음을 간직한 분이며, 객관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저의 ‘독특하고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지 이미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분은 여전히 제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계시며, 늘 저와 동행하는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교우님들은 방금 저의 아버지 이야기를 ‘고백의 언어’로 들으셨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종교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주관적으로 고백할 수는 있지만,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이런 분이다.”라고 객관적으로 단언할 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보다 크신 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는, 오래 전에 살던 사람들이 오래 전에 고백하고 기록했던 글을 근거로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단언하기에, 아직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과학과 합리와 상식을 모두 외면한 채 ‘오직 성경만’을 외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이삼천 년 전에 살던 분들이 인식한 하나님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지금도 강단에서 설교하는 분들이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4. ‘하나님을 믿는가?’보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더 중요
교리를 통해 배운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살펴 주시는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과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친히 행동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원하셨고, 홍해 바다를 가르셨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서의 예수님과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물 위를 걷겠다고 시도하다 익사한 경우는 있었지만, 실제로 물 위를 걸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런 장비 없이 맨 몸으로 물 위를 걷는다거나, 생선 두 마리와 빵 몇 개로 수천 명이 배불리 나누어 먹는 등의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기적’은 현실세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한다며 수만 명이 모이는 기도회를 주관하는 ‘신령하다는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기적을 내려달라고 기도하거나 시도하는 분은 없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은 한 소년의 행위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 도시락을 모두 내놓아 굶는 사람 없이 다함께 식사를 나누었을 것이라는 성서학자들의 해석이 그나마 설득력을 갖습니다.
해마다 발생하는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너무나 무력합니다. 지난주 화요일, 파키스탄에서 강진이 발생하여 삼백 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습니다. 2011년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거의 2만 명에 이르는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2008년 중국의 쓰촨성 대지진은 8만 명이 넘는 생명을, 2004년에 발생한 동남아 지진해일은 무려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자연은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자연재해 또한 그러합니다. 하지만 성서의 예수님(제가 ‘성서의 예수님’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도 ‘성서의 예수님’과 ‘실제의 예수님’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복음 10:29)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의하면, 수많은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자연재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수천수만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자연재해를 “너무나 자주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재앙들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손 하나 쓰시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도 되는 것일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시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여전히 고백해도 되는 것인가요?
이쯤 되면, 현실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성서의 기록에 대해 당연히 의심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실제의 하나님은, 그 옛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인식하고 고백했던 하나님과는 달리, 우리 인생들의 생사화복에 일일이 관여하시지 않는 분이 아닐까요? 어쩌면 실제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일일이 들어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가 이런 의심을 한다 하여 벌을 받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교우님들이 혹 계신다면 매우 슬픈 일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겨우 그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분께 너무나 큰 결례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논리적으로도 모순투성이인 성서의 문구와 오래된 교리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보다, 열린 마음으로 이웃종교의 견해에도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요?
5. 많은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
지구마을의 어떤 분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을 ‘이(理)’라고 부르고, 어떤 분들은 법(法), 또는 공(公)이라 부르며, ‘Cosmic Mind’나 ‘Cosmic Principle’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여러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원시 유일신 신앙’만은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하여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유일신 신앙’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지만, 유일신 신앙을 재해석하여 ‘배타적 유일신 신앙’을 넘어 ‘포용적 유일신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과거 기독교 전통에서 고백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인류의 아름다운 종교 유산과 신념체계를 모두 부정하는 ‘배타적 하나님’이었지만, ‘포용적 유일신 신앙’을 장려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온 세상 만물을 크게 품으시는 ‘한 울’님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런 ‘포용적 유일신 신앙’에는 배타성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우리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허락하신 것이기에, 지구마을 모든 종교와 문화도 (심지어 무신론까지도) 있는 그대로 포용해야 하며, 서로를 자매형제로 인정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포용적 유일신 신앙관에 의하면, 기독교와 이웃종교 모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담고 있는 그릇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그릇, 즉 특정 종교의 전통이나 제도를 절대화하여 갈등을 빚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스르는 것입니다. (포용적 유일신 신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교우님은 삼인출판사에서 발행한 김경재 저 <이름 없는 하느님>과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발행한 마커스 보그 저, 한인철 역 <새로 만난 하느님>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는 오래 동안 하나님을 오직 인격적인 신으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인격’이라는 개념은 신성의 신비와 독특성을 우리의 경험과 논리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인격’이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일 수 있지만, 그 용어를 절대화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안에 갇혀버리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셨다.”는 생각도 절대화해서는 아니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초인격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이라는 말을 순 우리말로 풀이하면 ‘사람다움’이 됩니다. “말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을 말처럼 생긴 신으로 이해했을 것이다.”라는 서양 속담처럼 하나님을 인격, 즉 사람의 모습을 한 분으로 이해한 것은 옛 믿음의 선조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인격’이라는 개념 안에 가두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고도 물읍시다.” 우리가 그렇게 물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더욱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그분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만나는 지구마을 모든 이웃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편지를 읽어주시는 교우님들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교우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에서부터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는 작은 밀알이 되어주십시오. 만일 우리 한국 교회가 배타 교리의 벽을 넘어 포용적 신앙으로 가는 이 일에 앞장서게 된다면, 지구마을은 종교와 문화에 의한 갈등을 극복하고 지구가족으로 대화합하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교우님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사입력시간 : 2013년 09월28일 [07:4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