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공포의 제국

제 목
삼성, 공포의 제국
작성일
2014-01-18
작성자

삼성, 공포의 제국
위대한 한국 성공의 뒷모습

르몽드디플로마티크 [58호]
2013년 07월 08일 (월) 15:53:25 마틴 뷜라르 hangija@ilemonde.com

기이한 형태의 유리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서울의 빌딩 숲 사이에서조차 삼성을 지나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삼성 고유의 로고는 눈에 띈다. 넓은 대로와 고급 승용차, 최신 유행 스타일의 젊은이들로 서울에서 가장 ‘번쩍거리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세계적 유명지가 된 강남의 중심부에 삼성타워가 우뚝 서 있다.

삼성전자는 3개 층에 최신 발명품을 전시하고 있다. 골프 선수나 야구 선수로 변신할 수 있는 거대 스크린, 3D 텔레비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냉장고 속 재료로 요리 레시피까지 제안하는 시스템을 갖춘 첨단 냉장고, 앞에 서면 심장 박동 수와 체온까지 측정해주는 거울.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삼성그룹의 보배 같은 인기 제품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출시된 스마트폰 갤럭시4이다.

삼성타워는 삼성의 빛나는 얼굴이다. 지난 5월 어느 날 늦은 오후, 수십 명의 젊은이가 이곳을 찾았다. 몇 km 떨어진 곳에 있는 서울대 학생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시관을 돌아다니며 삼성이 이루어낸 걸작 앞에서 놀라며 연신 말을 주고받는다. 이 학생들은 삼성에서 일하는 것이 ‘꿈’같은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미국의 애플, 일본의 소니를 삼성이 제치지 않았어요?” “삼성은 21세기 첨단 기술의 거인이 아닌가요?” 혁신의 성전인 삼성디자인에 최근 입사한 한 젊은이의 말처럼, 삼성 하면 흔히 듣게 되는 말이다. 또한 두바이에 삼성이 세운 세계 최대의 탑은 어떤가? 아부다비에 지은 핵발전소는? 젊은이의 자랑 섞인 질문은 연신 계속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에선 핵 시장은 사양세에 접어들었다. 삼성, 삼성, 계속되는 삼성… 삼성그룹의 문어발식 확장은 조선소에서 핵발전소·중공업·건설·놀이공원·군사무기, 전자, 대형 유통, 심지어 지역 빵집, 보험업과 연구소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끝을 모른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재벌’이라 부르는 데의 모습이다.(1) “한국에서는 재벌이 소유한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재벌이 세운 학교에 가고, 재벌이 주는 월급을 받고(거의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재벌에 의존하기 때문에), 재벌이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재벌 회사의 신용카드를 쓴다. 심지어 여가를 즐기거나 쇼핑하는 것도 재벌이 서비스를 공급한다”고 한국노동연구원(KLI)의 박재성 연구원은 말한다. 덧붙이자면, “선거에서도 재벌 덕분에 뽑힌다.” 거대한 ‘괴물’은 우파와 좌파 가리지 않고 자금을 대준다.

현대, LG, SK를 포함해 한국의 재벌 기업은 30여 개이고, 각기 특정 대기업 일가에 소유되어 있다. 그중 최고 재벌 일가는 삼성이다. 흥미진진한 재산 다툼 재판 속에 드러난 형제간 불화, 부패와 사치 등 삼성 일가의 뒷이야기는 미국의 통속 드라마 <달라스>에서나 나올 법하다. 삼성은 신기술 개발과 함께 이미지 제고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삼성그룹이 2012년 쓴 마케팅 비용만 90억 유로에 달한다.(2)

삼성의 역사는 1960년대 북한보다 산업화에 뒤처진 개발도상국에서 현재 세계 경제 15대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변화상을 상징한다. 삼성 창립자 이병철(1910~87)은 회사의 상징으로 별 3개를 의미하는 ‘삼성’이라는 이름의 작은 소매업부터 시작했다. 삼성 기록에 따르면, 그는 뛰어난 사업 감각으로 텔레비전과 냉장고 같은 대형 소비재 시장을 점유하게 되었고, 이어서 삼성전자는 한국뿐 아니라 서구 시장에서도 큰 수익을 거두며 삼성이라는 명성을 쥐게 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채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에게 삼성을 물려주었다.

삼성 휴대전화를 소각하다

이건희 회장은 그렇게 물려받은 삼성을 반도체(애플에 공급), 스마트폰, LCD, 텔레비전 분야에서 각각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렸고, 엔지니어링과 화학에서도 선두주자 중 하나로 승격시켰다. 삼성그룹은 매출액 규모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며 전 세계 재계 서열 20위에 든다.(3) 이건희 회장이 소유한 재산은 약 130억 유로(약 13조 원)로 추정되며 전 세계에서 69번째 갑부에 든다.

삼성은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일본 식민지배의 후원을 받아 1938년 처음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빠뜨리고 있다. 또 삼성그룹이 독재자 박정희에게서 적시에 적절한 후원을 받아 발전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삼성을 위해 토지, 재원, 세금감면, 삼성의 내수시장을 보호해주기 위한 특별조처 등을 시행했다. 결국 삼성의 성공은 독재의 순수 산물이지만 삼성은 이를 빼고 좋은 것만 취한다.

박재성 연구원에 따르면, 71살 이건희 현 회장은 “삼성그룹 자본의 극히 일부만 소유하고 있음에도 그룹의 사업 방향과 인사 결정에 절대적 권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그가 소유한 자본의 비중은 3%에 불과하다. 이건희 회장이 말하면 모두 지체 없이 복종한다. 1995년 그는 성차별적이지만, 전 직원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라.” 바로 이튿날 제품, 사업 방식, 관리 등 모든 것을 갈아엎었다. 이 유명한 ‘시장 대응’ 선언은 차후 삼성그룹의 성공과 이건희 회장의 전설을 만든다.

그로부터 2년 후 이건희 회장은 “휴대전화 품질이 형편없다”며 직원들 보는 앞에서 15만 개의 휴대전화를 불태워버린다. 소각의 이미지는 공장 전체에 각인되었다. 대충 일해서 나온 결과물은 태워버린 재만도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무결점’ 정책은 근로자들이 지켜야 할 기준이 되었고, 죄책감의 근원이자 하나의 도그마가 되었다.

삼성의 비리 폭로로 유명해진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핵심 중 핵심인 ‘구조조정본부’에서 근무했다. 6시간 이상 진행하는 이건희 회장과의 회의 시 화장실 갈 일이 생길까 두려워 임원진이 물 한잔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장 허락 없이는 누구도 발언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최소한의 의구심을 표하지 않는다. “독재자입니다. 명령하면 즉각 따라야 합니다.”

하청업자들 역시 복종 없이는 살길이 없다. 고급 도시 건축업 회사를 경영하며 한국을 잘 아는 한 프랑스 기업인은 익명으로 이렇게 고백했다. “여기서 일하려면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입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상호 신용으로 이뤄진다. 관계가 이뤄지면 삼성그룹에 전적으로 충성해야 한다. 손짓 눈짓 하나에 즉각 복종해야 한다. 좋은 점은 재벌의 보호하에 기술 혁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다른 재벌을 위해 일하거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봉건시대 주군관계”라고 했다. 뒤처진 다른 하청업자들은 하루아침에 수익이 감소하거나 공급자 목록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

김용철 변호사는 내부에서 삼성 조직을 직접 경험했다. 그는 7년1개월 동안, 이건희 회장과 회장의 탈법적 행위를 위해 일했다. 이중 회계장부, 언론인과 국회의원들을 매수하기 위한 검은돈, 그리고 현대미술 수집가인 이 회장 부인처럼 사적 용도로 쓰기 위한 비자금 마련과 같은 탈법 행위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수억 원의 돈이 들어 있는 계좌를 운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까지 근무했다.(4) 그는 2005년 퇴사했다. 2년 후 삼성 특검이 실시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배임과 조세포탈로 집행유예와 함께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현대그룹 계열사 사장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미국 국빈 방문 때 경제 사절단 중에 이 회장을 포함시켰다.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재벌 베르나르 타피를 여행 패키지에 넣은 것처럼.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이 너무 힘든 곳이었다. 2010년 그는 삼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삼성을 생각한다>(5)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삼성 일가의 권력 전횡과 국가 최고위층에까지 뻗친 부패의 유착관계를 상세히 묘사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로 남겨야 했습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이른바 ‘조·중·동’이라 칭하는 권력 유착 언론매체는 이 책에 관한 광고를 싣지 않았다. 서평도 올리지 않았다. 침묵의 계율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한겨레신문>뿐이었지만, 이 책 광고를 게재할 경우 삼성그룹 광고는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이 책을 알린 것은 소셜네트워크였다. 인터넷을 통해 20만 부가 팔려나갔다. 도서 분야에서는 큰 성공이었지만 김 변호사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향이자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보수주의자로 여겨진다. 그가 후회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책 출간 후 사회적 공론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삼성은 내 책을 ‘완전 허구’로 취급했습니다.” 삼성이 다시 움직인 것이다.

임상수 영화감독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 허구를 2012년 영화 <돈의 맛>(6)으로 재현했다. 그는 부패, 오만, 인간에 대한 경시, 살인까지 가는 가족 간 싸움 등 재벌의 행태를 능란하게 묘사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사무실에서 만난 임 감독은 “재벌은 인간을 노예화한다. 나는 재벌들의 메커니즘을 파헤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7) 그러나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권에 들지 못했다. 언론도 잠잠했고, 대형 상영관에선 영화 배포를 거부했다. 그가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이 영화에 대해 좌파에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좌파가 재벌이라는 아성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2개의 왕조가 있다. 북에는 김씨 왕조가, 남에는 이씨 왕조가 있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의원의 운명을 보면 이런 인상이 더 짙어진다. 노회찬 의원은 삼성으로부터 돈 받은 인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이유로 지난 2월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그 명단은 매우 중요한 명단이었다. 국가정보원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삼성그룹 임원과 중앙일보 임원 간의 대화를 녹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명단이었다. 녹취록은 대부분 사법부 차관, 고위급 검사, 다수의 기자, 유력 대선 후보 등 그들만의 멋진 세상에 건네진 돈 문제였다.

이 일의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노 의원은 국회 특별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며 이 추문을 압박했다. 그러나 사법부 차관의 사퇴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을 이용해 노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명단을 폭로했다. 그 여파에 대해 한치의 의심 없이 명단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대법원은 인터넷에 명단을 올린 이유로 노 의원의 면책 특권 효력을 정지시켰다. “코미디이지요. 저는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돈 받은 검사는 누구 하나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관련 특검을 행한 책임자의 아들이 삼성에 고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은 저를 통해 본보기를 보여주려 한 겁니다. 예전 친구까지 동원되어 제게 전화를 걸어 삼성과의 싸움을 그만두라고 설득할 정도로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말 듣지 않는 국회의원 길들이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노조원과 구내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지 않는다

노조도 마찬가지로 재갈을 물렸다. 삼성그룹 대변인 중 한 사람인 케빈 조는 “이는 모두 마녀사냥”이라고 부인한다. 나는 그와 이메일로 교신했다(삼성 관계자를 만나기란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만나기보다 어려웠다). 그에 따르면 “삼성의 많은 자회사에 노조가 있으며, 삼성은 노동권과 윤리 기준을 준수한다.” 그러나 삼성 노조는 내부 노조일 뿐, 1980년대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노조의 대부 격인 민주노총(KCTU)에는 소속되어 있지 않다. 사회학자인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삼성 경영진은 노조탄압을 위해 색출·검열·협박·볼모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8) 2011년까지만 해도 삼성 내에는 단수 노조만 허용되었다. 노조는 공공 행정기관에 등록되어야 했다. 만약 노조 신청 서류가 행정기관에 접수되면 공무원은 이를 삼성 경영진에게 알렸다. 삼성은 며칠 동안 노조 신청자를 색출하고, 공장 내 노조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앗아갔다. 2011년 1월 이후 복수 노조가 인정되었으나 민주노총은 여전히 삼성의 적으로 남아 있다.

노조원은 6명으로 30~50살 대였다. 그들은 모두 삼성의 울산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울산은 서울의 남동쪽으로 고속열차(KTX)를 타고 2시간 30분 거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한참이나 길을 우회해야 했다. 익명성 보장을 위해 그들의 주거지와 멀리 떨어진,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인 어느 오래된 집에서 그들을 만났다. 휴대전화 배터리, LCD, 태양 집열판을 생산하는 공장 주변보다는 외진 곳이 훨씬 쾌적했다. 또 훨씬 은밀했다. 그들은 “기자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외신기자는 더욱 그렇다”고 했다. 민주노총에 가입한 그들은 거의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문제’라는 한국말을 알파벳으로 표음한 약자 ‘MJ’로 분류되어 있었다. “구역마다 MJ 색출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MJ로 분류된 사람들을 괴롭히고 회유하고 또 ‘전염’을 막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동료의 증언이 이어졌다. “만약 누군가가 MJ와 우연히 저녁에 술 한잔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즉각 경영진에 호출됩니다. 경영진은 어떤 얘기를 들었고, 무슨 말을 했는지 묻습니다. 구내식당에서 MJ와 함께 밥도 먹지 말라고 합니다.”

기숙 노동자들, 자정 넘어서는 외출 금지까지

노조운동에 대한 제재는 엄청나다. 노조원 중 오직 한 사람만이 본래 작업장에서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공장 내 대외 자선담당 사무실로 전보되었다. 또 어떤 이는 물품 조달 서비스로 배치되었다. 네 번째 노조원의 말로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저는 아무것도 안 해요. 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아요. 그전에는 노동자였는데 지금은 아무 일도 없이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너스레를 떨지만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최근 노조에 다시 가입한 동료에게는 경영진이 말레이시아에서 몇 개월 동안 ‘의무적 연수’를 받으라고 했다. 그는 거부했다. 그는 지금 제재를 기다리고 있다. 여섯 번째 노조원은 4년 전에 해고되었다. 소송도 없었다.

또 다른 MJ들을 만났다. 서울 외곽 삼성 복합도시인 수원에서였다. 조장희씨는 예전에 삼성 에버랜드 유원지의 레스토랑 매니저였다. 그는 동료 2명과 함께 민주노총 지부 노조를 만들었다. 이전에도 노조 가입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일부는 승진하거나 자녀 교육비로 돈을 받았고, 일부는 압력에 굴했다. 그는 “어느 날부터 동료들이 더 이상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심지어 ‘직원 교육’ 시간에 임원진들이 우리를 회사를 망치는 깡패들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24시간 감시당하고 촬영되었다. 이들의 전화기는 도청되었고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은 협박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노조가 허용된 ‘대망의 날’, 전체 1만 명의 직원 가운데 노조 가입은 11명, 익명 가입은 68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노조와 사 측 동수로 구성되는 노사조정위원회에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지 못했다. 삼성그룹이 노조원들을 따돌리기 위해 교묘하게 위원회 구성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위원회의 반은 경영진으로, 나머지 반은 경영진이 적극 추천하는 직원 대표로 구성되었다. 남은 것은 민주노총이 최초로 법적 지위, 아니 삼성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조씨는 그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그는 결국 해고되었다. 나머지 두 노조 창설자는 3개월간 정직되었다가 고립시키기 좋은 다른 레스토랑 두 군데로 배치되었다.

울산과 수원에서 만난 이 노조원은 그들과 같은 정규직인 경우 “월급은 제대로 받는다”고 한다. 반면 비정규직은 같은 일에 대해 40~60%의 임금을 받으면서 아무런 고용 보장도 보너스 혜택도 없고, 주문이 줄어들면 당장 길거리로 내쫓긴다.(9) 그러나 삼성 소속이든 하청노동자이든 비정규직 수는 (공식 통계는 없다) 전체 근로자의 40~50%일 것으로 추산한다. 50살 이상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심한 사퇴 종용을 받는다. 근로 조건은 모두에게 힘들다. 비정상적인 근무 시간, 과도한 긴장감, 수많은 사고 등. 지난 1월 수원 근처 화성공장에서 불산 사고로 하청 근로자 1명이 사망했다.

외부에서 볼 때 공장 단지 내에서는 최소한의 위험도 용인하지 않는 것 같다. 겉치레를 중시하는 이건희 회장은 심혈을 기울여 화성·기흥·온양의 세 도시에 걸쳐 디지털 도시를 지었다. 거대한 순백색의 사각 건물, 멋진 유리 건물, 잘 깎인 잔디의 디지털 도시 삼성단지는 마치 대학 캠퍼스를 연상케 한다. 각 단지의 끝에는 기숙사가 있다. 여성 기숙사가 훨씬 많다. 여성 ‘오퍼레이터’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멀리에는 남자 기숙사가 있다. 남자들은 주로 설비 유지나 물품 보급을 맡고 있다. 전 세계에서 온 이 젊은이들이반도체를 생산한다.

매년 삼성 임원진들은 ‘인간 사냥’을 떠난다. 그들은 지방의 고등학교로 내려가 교사가 미리 뽑아 놓은 신입사원들을 데려온다. 분명한 것은 뽑히는 사람보다 구직자가 더 많다. 삼성은 명성이 높고 월급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신입사원에게 상당한 금액인 약 2천 유로가 월급이다(한국 법정 최저 임금은 600유로에 못 미친다). 한 여성 노동자는 “삼성에서 일하면 부모님도 도울 수 있고, 결혼도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 아가씨의 꿈은 순백색의 생산 작업장에서 사라졌다. 외부에서 볼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만 내놓고 작업복을 입은 우주인 같은 ‘기능공’ 모습에 모든 게 무균처럼 보인다. 그리고 철저한 보안이 이뤄지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외부 장식은 미래적일지언정 실행 방식은 중세적이다.

매일 최소 12시간 일해야 하고, 결속 의지를 높이기 위해 자선 활동에 참여하고, 이어서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일한다. 주 6일 근무다. 일요일이면 모든 근로자는 너무 피곤해서 기숙사에서 잠자기 바쁘고, 가족을 보러 가는 것은 거의 드물다. 갑수씨는 “우리는 삼성에서 일어나고, 삼성에서 밥을 먹고, 삼성에서 일하고, 삼성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삼성에서 잠을 잤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약간의 돈을 모아 그곳을 탈출할 수 있어 행복했다. 지금은 그보다 덜 힘든 다른 일을 찾았다.

물론 젊은 여성 노동자들은 저녁에 외출할 수 있다. “여기는 중국이 아닙니다.” 삼성그룹의 임원이던 한 관계자는 연신 이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조차 저녁에 외출하면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쩌다 자정 소등이 끝난 후 귀소하면 ‘경고장’을 받는다. 이때 회사 자선활동에 열심히 참여해야 경고장 기록이 말소된다.

피곤이 쌓일 정도로 일하기 때문에 무질서란 찾기 힘들다. 그러나 토끼같이 흰 작업복에 두건을 쓰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은 이런 기계화에 저항한다. 화장이 금지되어 있기에 그녀들은 인조 속눈썹을 붙인다. 의무적으로 눈까지 모자를 덮어 쓰지만 우아하게 보이도록 모자를 쓰는 방법도 착안했다. 3년간 그녀들을 영상에 담은 젊은 여감독 홍리경이 들려준 이야기다.(10) 고용되면 직장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에 회사를 그만둔 후 그녀들을 취재할 수 있었다. 갑수씨는 “우리 모두 공포 속에서 일했다”고 했다. 실수에 대한 공포, 업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에 대한 공포, 직업병에 대한 공포…. 반도체 생산을 위해서는 대량의 화학 제품, 극도로 위험한 가스, 전자기장 작업장이 필요하다. 여성 노동자들은 금속판을 매우 빠른 속도로 실수 없이 여러 개의 용재수조에 담그고 확인해야만 한다.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법 등 2천 건 위반

서류를 보면 안전 기준이 나와 있다. 그러나 화성공장에서 지난 1월과 5월 두 번에 걸쳐 불산 가스 누출사고가 있었다. 환기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직접 방사능 개폐문을 연다. 이 일과 관련해 돈을 받지 않지만 그녀들은 전체 결과에 책임을 느낀다. 이처럼 노동 강도가 심해 여성 노동자들은 4~5년을 견디지 못한다. 다른 직장을 찾거나 부모님에게 돌아가거나 결혼한다. 입사자 중 53.1%만 남고,(11) 일부는 사망한다. 22살 황유미씨는 기흥공장에서 4년간 근무한 후 2007년 사망했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 30분 거리의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딸이 몇 달 동안 암으로 어떻게 시들어갔는지 매 순간을 기억한다. 그는 “삼성의 독선적 관료주의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고 했다. 삼성이 그를 협박하고 입 다물게 하기 위해 금품으로 회유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절대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다. 딸이 걸린 암이 당국뿐만 아니라(당국은 이미 산재로 인정) 삼성에도 산재로 인정되기 원한다. 그러나 삼성은 이를 부인한다. 그가 싸우는 것은 딸을 위해, 또 여전히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다.

황상기씨의 말을 들어준 이는 이종란 변호사이다. 위험한 물질이 집약된 삼성 공장에서 야기된 수많은 재해는 끊이지 않는다. “회사에선 우려할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만, 사용되는 물질의 정확한 내용에 대해선 ‘생산 기밀’이라는 이유로 건네주지 않습니다.” 공정옥 의사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는 2007~2012년 5월까지 백혈병, 유방암, 다발성경화증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삼성의 옛 노동자 154명에 대해 집계·조사했다. 삼성 관련 전문가들은 이런 직업병은 “삼성의 추한 비밀”이라고 말한다. 화성공장의 유독 가스 누출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10분거리에 있는 수원의 부촌에서 우려의 소리가 나오자 삼성 경영진들은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그러나 단 한 건의 산업재해 조사를 위해 수개월의 절차를 거친 후, 근로복지공단이 마침내 이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이 자문을 구한 의료진은 결국 삼성 계열 의료진이었다.(12)

*글?마틴 뷜라르 Martine Bulard
주요 저서로 (중국-인도. 용과 코끼리의 경주)>·(Fayard·Paris·2008) 등이 있다.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1) Laurent Carrou?, ‘아시아의 용의 반격과 한국인 노동자들’(Les travailleurs cor?ens ? l’assaut du dragon), Jacques Decornoy, ‘한반도 전쟁의 미묘한 종식’(D?licate fin de guerre dans la p?ninsule de Cor?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 본지 1997. 2, 1994. 11.
(2) Benjamin Ferran, ‘삼성, 마케팅 비용에 90억 유로 투자’(Samsung a d?pens? 9 milliards en marketing), <르 피가로>, 2013. 3. 14.
(3) ‘Global 2000 companies’, , New York 2013. 5. www. forbes.com/global2000/list/
(4) 1천 원은 0.6유로.
(5) 한국어로만 출간되었다.
(6) Wild Side Video에서 참조.
(7) 프랑스 본지 인터넷 사이트 인터뷰 참조. http://blog.mondediplo/ net /1462.
(8) 조돈문 교수 연구 ‘삼성 노조탄압의 전략, 노조 설립을 위한 삼성 근 로자 투쟁의 역사’(2012).
(9) Jean Marie Pernot, ‘민주주의를 위한 노조의 싸움’(Des luttes syndicales pour la d?mocratie), , n°135, Paris, 2012. 3.
(10)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2013).
(11) OECD 국가 평균의 56.7%.
(12) ‘한국 정부, 삼성 의료진의 의견을 근거로 삼성 노동자의 배상 책임 기각’ 2013. 5. 31. 반올림, http://stopsamsung.wordpress.com/

디플로마티크 원문보기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1

23개3개좋아요좋아요 · · 홍보 · 공유하기..

강성필, 문충석, 박혜숙님 외 20명이 좋아합니다..

이대로 길지만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1월 19일 오전 12:06 · 좋아요 취소 · 1
..

김수일 답따압파다 답따압패~

1월 19일 오전 12:16 · 좋아요 취소 · 1
..

문충석 잘 읽어 보았습니다.

1월 19일 오후 5:57 · 좋아요 취소 · 1